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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에서

이어집니다.

 

 

8. '파리 교향곡'(Paris Symphonies)과 오라토리오 '가상칠언'(架上七言)

전술한 것처럼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지'가에 있는 동안 음악가로서 극진한 예우를 받으면서 궁정 내부에서는 마음껏 작품활동을 펼쳤으나, 고용계약서 상 악보와 공연의 저작권이 모두 '에스테르하지'가에 귀속된다는 조항 때문에, 또 대단한 음악 애호가였던 '에스테르하지'가의 주인 '니콜라우스 1세' 의 끊임없는 음악적 주문을 소화해 내느라 자신의 음악을 대외적으로 알릴 시간과 기회는 거의 없었습니다. 더구나 '스테르하지'가의 궁정이 한적하고 외진 곳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외부 음악계는 '하이든' 음악의 작품성을 초기 몇 작품과 들리는 소문으로만 접할 수 있었지 실제로 그의 음악을 직접 음미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안타까운 시간이었습니다.

(하이든의 에스테르하지 궁정 고용계약서)

 

그러던 것이 1779년 고용계약서를 새로 쓰면서 '니콜라우스 1세'가 '하이든' 작품의 저작권에 관한 규제사항을 상당 부분 완화해 줌으로써 드디어 '하이든' 작품들이 '에스테르하지' 궁정을 벗어나 다른 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됩니다. '하이든'은 그때부터 국내외 출판사에 작품을 보내 악보집을 출간도 하고 외국으로부터 작곡 의뢰를 받기도 합니다.

(Stabat Mater)

1781년 경에는 마침 프랑스에서 '하이든'의  '스타바트 마테르(Stabat Mater)'라는 작품이 대 히트를 치게 됩니다. 이 작품은 1767년 작곡했던 교회 예배용 성가곡입니다. 원래 종교음악 작곡은 '에스테르하지'가의 음악장 '그레고르 베르네어(Gregor Werner)'의 고유 영역이었기 때문에 '하이든'은 부음악장으로 있는 동안 성가곡을 거의 쓰지 않았으나 '베르네어'가 1766년 사망하고 음악장으로 승진하면서 만든 성가곡이 바로 '스타바트 마테르'입니다. 

(스타바트 마테르)

'스타바트 마테르'는 '어머니가 서있다'는 뜻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지켜보면서 슬픔에 잠겨 있는 성모마리아'를 노래한 것인데 '하이든' 이전의 '페르골레시', '비발디'와 '하이든' 이후와 '슈베르트', '로시니', '드보르작' 등 수많은 작곡가들이 동일한 제목으로 작품을 발표한 기독교 음악의 중심 테마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당시 '하이든'의 '스타바트 마테르'는 프랑스 뿐 아니라 독일, 영국 등 다른 나라에서도 극찬을 받으면서 '하이든'의 이름을 유럽 음악계에 더욱 각인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파리교향곡')

이를 계기로 1785에는 프랑스의 궁정 오케스트라로부터 작곡 의뢰를 받게 되었고 이때부터 2년에 걸쳐 교향곡 82번('곰'), 83번('암탉'), 84번('주의 이름으로'), 85번('왕비'), 86번, 87번 등이 연달아 완성되는데 사람들은 이 6개곡을 묶어서 '파리 교향곡(Paris Symphonies)'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현대의 음악평론가들은 이 파리교향곡에 대해 "광휘와 기품과 아늑함이 놀랄만치 잘 어우러진 작품이다.", "이 위대한 작품에는 '하이든'의 위트가 배어 있지 않은 소절이 한 군데도 없다. 그의 위트는 오늘날 너무나 강하고도 친근하게 우리 가슴 속을 깊숙이 파고들어 무한과 창조의 힘을 동시에 가지는 일종의 격정을 낳고 있다."와 같은 극찬의 표현을 아끼지 않습니다.

 

(하이든 파리교향곡 6곡)

(오라토리오 '예수님의 가상칠언')

또 1787년에는 스페인의 남서부 해안도시 '카디스'(Cadiz)의 한 교회로부터 작곡 의뢰를 받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후 운명하기까지 말씀하신 7마디를 주제로 '구세주가 십자가에서 남긴 마지막 일곱 마디 말씀' (가상칠언, The seven last words of Our Saviour on the cross)이란 제목의 오라토리오를 작곡합니다. 당시 유럽의 카톨릭 교회에서는 '성 금요일'(부활절 직전 금요일) 예배 때 사제가 이 7마디의 말씀을 한마디 설교한 후 제단 앞에서 10분정도 무릎 꿇고 기도한 다음 다시 제단에 올라가 다음 말씀 한마디를 설교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는데, 설교의 사이 사이 비는 시간마다 연주하는 곡이 바로 이 작품이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미사에 사용되는 교회음악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공연음악으로서의 가치를 담아내고자 정성을 들였던 것 같습니다. 중간 중간 맥이 끊어지는 이 음악이 일반 공연시 어떻게 하면 청중이 지루해 하지 않고 귀를 기울이는 작품으로 만들 수 있을까 고심했다고 합니다. 이 곡은 스페인 뿐 아니라 여러 나라의 교회로 확산되었고 하이든은 대중에게 좀 더 가까이 가기 위해 이 오라토리오 곡을 현악 4중주곡, 피아노 독주곡 등으로 개작해서 여러가지 버전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곡은 하이든 작품 가운데 최고 걸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으며 하이든 스스로도 가장 흡족해 하는 작품이라고 합니다.

9. 영국에서 만년의 꽃을 피우다 - '런던 교향곡(London Symphonies)'

'하이든'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에스테르하지'가의 '니콜라우스 1세'가 1790년 사망하고 그의 아들 '안톤'이 대공 자리를 물려 받으면서 '하이든'의 음악활동은 또 다른 전기를 맞게 됩니다. '안톤'은 아버지와 달리 음악과 오케스트라 운영에 별 관심이 없는데다 재정절감을 위해 '하이든'의 연봉을 포함한 모든 음악적 지출을 삭감합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바깥 세상으로 나래를 펴고픈 '하이든'에게 시간적, 공간적 자유를 제공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런던교향곡)

'에스테르하지'가에서 어느덧 58세의 만년에 이른 '하이든'은 이제서야 비로소 궁정의 울타리를 벗어나 국제 무대로의 진출을 모색합니다. 그때 마침 독일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공연기획자인 '요한 페테르 잘로몬(Johann peter Salomon)이 '하이든'에게 영국에 가서 작곡활동을 하자고 제안합니다. 당시 영국은 '헨델' 사후 '바흐'의 막내 아들인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Johann Christian Bach)가 20년 가까이 런던 음악계를 주름잡다가 타계한 지 몇 년 안 된 시기여서 아직 이렇다 할 음악가가 없었던 상황인데다, 이미 '하이든'의 명성은  그곳에서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절묘하게 필요충분 조건이 완성된 셈이었습니다.

드디어 독일 뮌헨과 본을 거쳐서 1790년 12월 31일 프랑스 '칼레'에서 배를 탄 '하이든'은 다음날인 정월 초하루, 런던에 입성합니다. 전편에서 언급했듯이 '하이든'과 부자지간 이상의 음악적 정을 나눴던 '모차르트'가 그를 떠나 보내면서 "영어도 한마디 못하시는데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부디 몸 건강히 잘 다녀 오십시오."하고 눈물을 글썽이며 걱정의 말을 하자 '하이든'은 "나의 음악은 만국 공통어인데 무엇이 걱정이겠는가."라면서 작별 인사를 나눴다는 사연은 많은 사람들 입에 회자되는 에피소드가 되고 있습니다.

 

(런던교향곡 12곡)

 

다행히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영국 시민들의 환영의 물결은 대단했다고 합니다. 전 일간지에 3일동안이나 '하이든'의 영국 방문 소식이 대서 특필되었고 연일 음악애호가들의 식사 자리에 초대를 받았으며 영국 왕 '조지 3세'는 '하이든'이 영국에 영원히 머물 의향이 있다면 왕이 거주하는 '윈저' 성에 숙소를 마련해 주겠다고 제안하는 등 극진한 대접을 받습니다. 과연 '모차르트'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던 셈인데, 오히려 자신을 걱정해 주던 '모차르트'가 그와 작별한 지 1년 정도 되는 1791년 12월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손 한번 다시 못 잡아 보고 먼 타국에서 아들같고 친구같았던 '모차르트'를 마음에 묻을 수 밖에 없었던 '하이든'에게는 더할 수 없는 아픔이 아니었을까 짐작됩니다.

그는 1792년 귀국하였다가 1794년에 다시 방문하여 1795년까지 모두 4년 정도를 영국에서 지내면서 '하이든' 생애 최고의 걸작이랄 수 있는 수많은 명곡을 남깁니다. 특히 그가 런던 체류 중 발표한 1차 방문시 6곡(93번부터 98번)과 2차 방문시 6곡(99번부터 104번) 등 총 12곡의 교향곡은 하나같이 주옥같은 작품으로서 영국 음악계를 완전 사로 잡습니다. 우리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놀람교향곡(94번, Surprise), '96번 교향곡 '기적'(Miracle), '100번 교향곡 '군대'(Military), 101번 교향곡 '시계'(Clock), 104번 교향곡 '런던'(London) 등은 모두 이때 만들어진 곡들입니다. 그래서 이 12곡의 교향곡은 묶어서 '런던 교향곡(London Symphonies)' 또는 공연기획자 '잘로몬'의 이름을 따 '잘로몬 교향곡(Salomon Symphonies)'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10.  현재의 독일국가인 '황제 찬가', 그리고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와 '사계'

영국 2차 방문에서 비엔나로 돌아온 1795년 하이든의 나이는 63세. 그 사이 '에스테르하지'가의 '안톤'은 사망했고 후임 대공으로 등극한 '니콜라우스 2세'는 다시 궁정 오케스트라를 재건하고자 '하이든'을 궁정악장으로 초빙합니다.  그러나 이제 비엔나 음악계의 중심에 서게 된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지' 궁정을 위해서는 비상근으로 간간이 작곡과 공연을 해 주긴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비엔나 교외의 대저택에 머물면서 작품 구상과 후진 양성에 매진합니다.

(하이든 하우스, 1060 Vienna, Haydngasse 19, 하이든이 1797년부터 1809년까지 말년을 보낸 저택, 현재는 하이든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입구 통로에는 그가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와 '사계'를 이곳에서 작곡했다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황제찬가)

'하이든'은 영국 체류시 영국 국가에서 받은 감명을 살려, 아직 국가가 제정되어 있지 않았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황제인 '프란츠 2세'를 위해 '황제찬가'(Emperor Hymn, Gott erhalte Franz den Kaiser, '프란츠' 황제를 보우하소서)를 작곡합니다. 당시는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를 군사적으로 핍박하던 시기였으므로 국왕에게 힘을 보태주기 위한 애국심에서 작곡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노래의 멜로디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매우 익숙합니다. 찬송가 245장 '시온성과 같은 교회'의 바로 그 멜로디이기 때문이죠.

이 멜로디는 찬송가 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차용해 쓰이고 있습니다. 이 노래는 1797년부터 1918년까지 오스트리아 국가로 사용됐으며 - 그 후 1946년부터 현재까지 쓰이는 오스트리아 국가는 '모차르트'가 작곡한 '산의 나라, 강의 나라'(Land der Berge, Land am Strome)가 사용되고 있음 - 독일은 1922년부터 이 노래 멜로디에 가사만 바꿔서 독일 국가(Deutschlandlied)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 선율이 너무 귀에 익숙해서인지 사람들은 이 멜로디가 '하이든'이 작곡한 것이 아니라 크로아티아 민요에서 표절한 것이라고 우기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하이든' 조상의 핏줄이 원래 크로아티아에서 연원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그의 혈연에 대해서는 독일 출신설, 헝가리 출신설 등 매우 다양합니다. 똑부러진 증거가 있는게 아니라서 그냥 설에 불과하지만 아무튼 이 노래 멜로디와 크로아티아 민요의 가락을 비교해 보면 정말 비슷하긴 합니다.

 

(황제찬가와 크로아티아 민요의 멜로디 비교)

 

이 멜로디는 하이든 이후에도 베토벤, 슈베르트, 로시니, 파가니니, 도니체티, 슈만, 스메타나, 차이코프스키 등 대 작곡가들이 여러 작품에서 인용해 쓰게 되는데 이쯤 되면  멜로디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따지기에 앞서 그야말로 시대를 뛰어 넘어 전세계 음악애호가들을 끌어 당기는 강한 흡인력을 가진 선율이라고 아니할 수 없겠습니다.  이 '황제 찬가'는 나중에 '현악 4중주 Op.76'의 6곡 중 No.3에 Emperor라는 제목으로 삽입됩니다.

(천지창조)

1798년에는 그의 오라토리오 중 최고 걸작인 '천지창조(Creation, Die Schöpfung)를 발표합니다. 성경 창세기의 내용을 주제로 한 이 작품은 전체 3부로 구성되어 하나님의 7일간의 천지창조 사역을 날짜별로 아리아, 삼중창, 합창 등으로 노래한 1시간 45분짜리 대작입니다. '하이든'은 영국 방문 시 과거 '헨델'이 작곡했던 '메시아'  등 걸작 오라토리오에 감명을 받고 이 작품을 구상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 작품은 1798년 비엔나에서 초연된 이후 '하이든'의 살아 생전에만도 유럽은 물론 미국, 러시아에서까지 총 40여회나 공연되는 기록을 남깁니다. 그러고 보면, '하이든'의 말년 작품들은 런던 활동 시 느꼈던 여러가지 소회가 많이 반영됐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계)

이어서 1801년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 4개 파트에 총 36곡의 독창, 중창, 합창, 관현악으로 이뤄진 대작 오라토리오 '사계(Seasons, Die Jahreszeiten)'를 무대에 올립니다. 신의 이야기인 '천지창조'와 달리 '사계'는 농부를 주인공으로 전원생활의 사철 변화하는 풍경들을 노래와 악기에 담아낸 서정적 작품인데 공연 시간만도 170분에 달하기 때문에 대중 공연에서 작품을 감상할 기회는 흔치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작품은 당시 '천지창조'만큼 큰 흥행을 얻어내지는 못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런 작품을 지난 2017년 10월, 서울시 합창단이 전곡 공연을 해 냈다고 하니 대단합니다.

 

11. 건강악화 - 베토벤과의 화해 - 죽음 - 두개골 실종과 145년만의 귀환

'하이든'의 건강은 오라토리오 '사계'를 쓸 무렵부터 나빠지기 시작해서 이 작품을 완성하는데 2년이 걸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1803년 말부터는 거의 작곡을 할 수 없을 만큼 건강이 악화됩니다. 뚜렷한 병명을 진단받지는 못했으나 다리가 붓고 어지럽고 맥박이 불규칙하면서 불면증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현대 의학자들은 '하이든'의 병세가 아마도 동맥경화증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기도 합니다. 그는 당시 주변 사람들에게 "나의 머리 속에는 늘 선율이 맴돌고 있는데, 무언가 써야만 하겠는데, 몸이 말을 들어 주지 않는군요. 나의 상상력은 나의 몸이 마치 피아노인 것처럼 내 몸을 두들겨 댑니다. 쓰지 못한다는 건 나에게 큰 고문입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합니다.

'하이든'의 이런 병세는 죽기까지 계속됩니다. 1808년 3월에는 그의 76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된 오라토리오 '천지창조'를 공연하는 소규모 음악회에 초대를 받고 휠체어에 실려 참석하는데, 지휘를 맡은 '살리에리'를 비롯해  '베토벤' 등 많은 후배 음악가들의 뜨거운 영접을 받으면서 오롯이 자신만을 위한 무대를 감동으로 지켜 보기도 했지만, 결국 몸이 불편해 전반부만 관람하고 인터미션 중 집으로 돌아 올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때 '베토벤'은 눈물을 흘리며 무릎 꿇고 '하이든'의 손에 키스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하이든'이 '베토벤'을 처음 만난 것은 1790년 영국으로 가는 도중 독일의 '본'(Bonn)에 들렀을 때였습니다. 당시 스무살의 약관 '베토벤'은 그 해에 바로 비엔나로 옮겨서 활동을 시작했고 '하이든'에게 음악지도를 받으려고 무척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하이든'은 나름 '베토벤'의 작곡 공부를 도와 줬다고 하는데, '베토벤' 입장에서는 '하이든'의 지도가 만족스럽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하이든'은 '베토벤'을 늘 제자라고 여기고 있는데 반해 '베토벤'은 "나는 '하이든'에게 배운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공언했을 정도라고 하니까요. 그래서 그동안  '하이든'과 '베토벤'의 관계는 다소 서먹하고 불편했었던 것 같습니다. '하이든'이 '모차르트'와는 부자지간이나 친구와 같이 정겨운 관계를 유지한 것과 대조적입니다.

'하이든'과 '베토벤'의 이러한 관계는 음악지도 상의 문제였다기 보다는 두 사람의 음악적 기질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더 맞는 것 같습니다. '하이든' 음악은 궁정 귀족들의 귀에 듣기 좋은 아름답고 소박하고 위트가 넘치는 음악 본연의 맛에 중점을 두었다면, '베토벤' 음악은 계몽주의와 혁명정신을 배경으로 인간의 자유와 숭고함을 담아내고자 노력한 신세대 음악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토벤'은 바쁜 '하이든'이 음악지도에 조금 소홀함을 보인데 대해, 노인네가  자신의 새로운 음악세계를 인정해 주지 않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고 불만을 품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평가하듯이 베토벤 음악이 구성이나 기교 등 여러가지 측면에서 은연중 '하이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베토벤' 자신도 어느정도 나이가 들면서 이같은 사실을 인정하게 됐으며, 누구에게도 무릎 꿇은 적 없는 '베토벤'이 결국 이 작은 음악회에서 '하이든'에게만은 몸을 낮춰 키스함으로써 스승을 대하는 극상의 존경을 표했다고 하니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후 몇 년을 더 병마에 시달리던 '하이든'은 1809년 5월 31일 77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어갑니다. 이때는 불행하게도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비엔나를 침략하여 포탄을 쏟아 붓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사실인지 모르겠으나 재미있는 것은 프랑스 군인 하나가 '하이든'이 죽기 며칠 전 찾아와서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에 나오는 아리아를 부르면서 '하이든'에게 존경의 뜻을 전하고 돌아갔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하이든'의 장례식은 전쟁 중이었던만큼 소박하게 비엔나의 '쇠텐' 교회(Schottenkirche)에서 '모차르트'의 '레퀴엠(진혼곡)'이 연주되는 가운데 치뤄졌고 먼저 간 가족들 묘소가 있는 '훈트스트룸'(Hundsturm) 공동묘지에 묻힙니다.

(아이젠슈타트의 베르크 교회와 하이든의 묘)

 

(두개골 실종과 귀환)

그의 유해는 1820년 '에스테르하지'가의 요청에 따라 '아이젠슈타트'(Eisenstadt)로 옮겨져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조상들이 잠들어 있는 '베르크' 교회(Bergkirche)에 안장됩니다.  그런데 이 때 '하이든'의 유해에서 두개골이 없어진 엽기적인 사실을 뒤늦게 확인하게 됩니다. '에스테르하지'가는 우선 모형으로 두개골을 만들어 '하이든' 안장식을 치른 후 ''하이든' 후손들과 함께 진상 파악에 나섭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원래 '에스테르하지'가에서 집사로 일하던 '로젠바움'이란 사람이 1809년 장례식 직후 무덤을 도굴하여 '하이든'의 머리를 떼어간 것이었습니다. '하이든'의 천재적인 두뇌를 비싼 값에 실험용으로 팔아 넘기려는 의도였다고 하는데 생전에 '하이든'과 잘 알고 지낸 사람이 어떻게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이든'의 두개골은 그 후 백여년 이상 여러 명의 의사나 과학자들 손을 거치면서 실험용이나 전시용으로 쓰이는 수모를 겪습니다.  '에스테르하지'가는 간신히 '하이든' 두개골의 행방을 알아내 두개골 반환소송을 벌이지만 재판과정이 녹록치 않은데다 세계대전이 두차례 겹치면서 지지부진하다가 1954년에야 실종된 지 145년만에 겨우 두개골을 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되찾은 두개골은 모형으로 만들었던 두개골과 함께 안장해서 현재 '하이든'의 머리는 두 개가 들어 있다고 합니다. 아무튼 남에게 무언가를 한번 빼앗기면 자기 머리라 해도 되찾기가 이렇게 어렵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습니다.

12. '하이든'은 '프리메이슨'이었나?

'하이든'에 관한 자료를 읽다 보면 조금 특이한 단어가 등장해서 눈길을 끕니다. 바로 '프리메이슨'(Freemason)이란 단어죠. 그가 '프리메이슨' 회원이었다는 것인데요. 먼저 '프리메이슨'이란 신비조직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겠지만 이는 너무 길고 복잡한 얘기가 되기 때문에 여기서는 '하이든'과 관련된 내용만 요약해 보고자 합니다.

'메이슨'(Mason)은 글자 그대로 돌을 다루는 석공을 뜻합니다. '프리메이슨'은 고대의 첨단 건축물인 피라미드를 짓던 석공들이 모여서 만든 친목 단체에서 기원한다는 설이 있으며, 대규모 교회 , 궁전 등 석조 건축물이 붐을 이루던 중세유럽의 르네상스 시기까지도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등 천재적인 과학자, 예술가들이 '프리메이슨'의 회원으로서 각종 건축물이나 미술작품 속에 '프리메이슨'의 비밀스런 표식을 숨겨 두었다는 얘기가 있으나 역시 베일 속에 가려진 설에 불과하고 공식적으로 '프리메이슨'의 조직이 결성된 것은 1717년 영국에서라는게 정설입니다.

'프리메이슨'이란 단체가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시점에서는 석공이라는 직업과는 관계없이 절대적인 신의 존재를 믿으면서 인간의 자유, 합리성, 도덕성을 존중하고 박애주의 정신에 동의하기만 하면 종교의 종류를 불문하고 회원이 될 수 있는 개방적이지만 엘리트들만의 조직이었습니다. 이 조직의 내규 상 종교에 관해서는 토론하는 것조차 금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자신들만의 이상한 기호와 표식으로 장식된 공간을 만들어 놓고 매우 독특한 의식을 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로마 교황청은 '프리메이슨'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탄압하기 시작했으며 세간에는은연중 이 조직이 사탄을 숭배하는 종교집단이 아닌가 의심을 하게 됩니다.

(프리메이슨의 표식, 각도기, 직각자, 빛나는 눈동자)

 

과연 '하이든'은 이런 이상한 조직의 회원이었을까요? '프리메이슨'은 이상하고 신비스런 조직이긴 하지만 비밀조직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들의 집회 장소나 회원명단 등은 일반에 공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프리메이슨' 회원으로 공공연히 알려져 있는 사람들은 유명인사 중에서도 수없이 많습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조지 워싱턴, 벤자민 프랭클린을 비롯해 루즈벨트 등 다수의 미국 대통령들, 프랑스의 전제군주 나폴레옹과 사상가 볼테르, 몽테스키외, 모차르트. 리스트. 브람스 등 음악가, 괴테, 스탕달, 오스카 와일드, 코난 도일 등 문학가, 다윈, 플레밍, 와트 등 과학자들이 포함되고 있습니다. 많은 회원들이 사회적 지위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이다 보니 '프리메이슨'을 전세계 정치, 경제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신비종교 집단이라고 몰아붙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저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고 자선행사를 주최하는 박애주의 단체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조직의 진실된 정체가 무엇인지 규명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은데, 이와 관계없이 '하이든' 당시의 '프리메이슨'은 어려운 음악가나 과학자들에게 좋은 조건으로 자금을 융통해 주는 활동을 했기 때문에 돈에 쪼들렸던 많은 가난한 엘리트 그룹이 이 모임에 가입한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당시 '프리메이슨' 회원으로 열심히 활동한 사람이 바로 '모차르트'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1784년 12월 '프리메이슨'에 가입했고 1785년 2월 '하이든'도 회원으로 등록됩니다. 이 때는 '하이든'과 '모차르트'가 친해지고 나서 얼마 안된 시점인데 아마도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권유 때문에 가입하게 된 것이 아닐까 짐작됩니다.

'모차르트'의 '프리메이슨' 활동에 관해서는 '모차르트' 편에서 상세히 다루겠지만, 그는 '프리메이슨' 내에서 '마스터(Master)' 직분을 받을 정도로 열성을 보였고 '프리메이슨'의 각종 행사와 의식에서 연주되는 진혼곡 등 많은 작품을 작곡했고 그의 마지막 오페라 '마술피리'에서는 곳곳에 '프리메이슨'의 상징들을 숨겨 놓은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이에 반해 '하이든'은 회원으로 가입하고서도 '프리메이슨'을 위해 특별한 활동을 한 기록이 없고 특히 1787년부터는 회원명단에서 그이 이름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중도에 탈퇴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한편, 계몽주의에 심취했던 '베토벤'도 '프리메이슨'에 이름을 올렸던 것으로 알려지는데 그다지 두드러진 활동은 없었다고 합니다.

13. '하이든'의 여인들

마지막으로 '하이든'의 주변에는 어떤 여인들이 있었는지 살펴 보면서 긴 이야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하이든'은 1760년, 그러니까 그가 '모르친' 백작가의 '카펠마이스터'로 고용되어 막 음악의 꽃을 피우기 시작할 무렵, 결혼을 하게 됩니다. 신부는 가발업자이자 '하이든'의 후원자였던 '켈러'(Keller)의 맏딸, '마리아 안나'(Maria Anna)로 3살 연상이었습니다. '켈러'는 '하이든'이 반 백수로 어려웠던 시절, '하이든'에게 둘째 딸 '테레제'(Therese)의 음악 가정교사를 맡김으로써 재정적으로 보탬을 주었던 고마운 사람이었죠.

문제는 '하이든'이 '테레제'를 가르치면서 그녀를 사랑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하이든'이 그녀와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말하자 '켈러'는 안면을 바꿉니다. 큰딸이 아직 시집가지 않았는데 둘째를 결혼시킬 수는 없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그러면서 은근히 큰딸과 혼인할 것을 강요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성경에 나오는 '야곱'의 외삼촌 '라반'이 둘째 딸 '라헬' 대신에 맏딸 '레아'를 신방에 밀어 넣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이런 와중에 '테레제'는 아버지의 반대를 극복할 수 없다 생각했는지 수녀가 되겠다며 수녀원으로 떠나 버립니다. 아마도 착한 '하이든'은 자신 때문에 둘째 딸을 잃게 된 '켈러'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사랑하지도 않는 '마리아 안나'와의 혼인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이는 '하이든' 평생의 잘못된 결정이 됩니다.

'마리아 안나'는 '하이든'을 음악가로서 존경하기는 커녕 아예 음악 자체에 전혀 이해와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는 '하이든'의 악보를 가져다 퍼머 머리 마는데 쓰거나 파이 굽는 그릇 깔개로 썼다는 전설이 전해질만큼 패악을 부렸던 여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이든'은 아이가 생기면 부부관계가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아이를 낳으려고 꽤 노력을 했지만 끝내 아이는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또 '마리아 안나'는 자신이 불임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겠다고 바람을 피우기까지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두 사람은 당시 카톨릭 율법상 이혼이 불가능해서 같이 살 뿐이었지 완전 남남처럼 지내게 됩니다. 이같은 명목상 부부관계는 그녀가 180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됩니다.

그러다 보니, '하이든'에게 다른 여자는 없었을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하이든'이 미남은 아니었지만 다정다감한 성격에 인심도 후해서 여자들이 늘 따르는 편이었으며, 또 슬하에 아이들이 없어서 그런지 유독 어린아이들을 보면 음악을 가르쳐 주고 장난도 치면서 귀여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하이든'에게는 유부녀들과의 염문이 많습니다.

당시 기록물이나 '하이든'이 주고 받은 편지글을 통해 그가 친분을 나눈 여인들로 짐작되는 사람들은 '에스테르하지'가 궁정의사의 부인 '마리안느 폰 겐징어'(Marianne von Genzinger)를 비롯해 특히 영국에서 활동하던 시절 만난 유명 외과의사 '존 헌터'(John Hunter)의 부인 '앤 헌터'(Anne Hunter), 그리고 음악애호가나 귀족 부인들인 '레베카 슈뢰터'(Rebecca Schroeter), '엠마 해밀턴'(Emma  Hamilton) 등 수없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 여인들과의 관계는 그저그런 여사친의 관계였을거라는게 학계의 정설입니다.

다만, '하이든'이 '에스테르하지' 궁정에서 일할 때 만난 여인 '루이지아 폴첼리'(Luigia Polzelli)와의 관계만은 상당히 깊은 연인 사이가 확실한 것으로 세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탈리아 나폴리 출신 메조 소프라노 가수로 1779년 '에스테르하지'가의 오페라 단원으로 들어 옵니다. 그녀는 당시 나이가 스무살에 불과했지만 바이올린 연주자인 남편과의 사이에 이미 아이가 하나 있는 유부녀였습니다. 그녀의 노래 실력은 별로 탐탁한 것이 아니어서 '하이든'의 음악을 소화해 내지 못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이든'은 그녀의 음역에 맞도록 악보를 고쳐주기까지 하면서 그녀를 감싸고 돕니다.

그녀의 남편이 죽자 두 사람은 결혼하기로 하지만 결국 '마리아 안나'와의 이혼이 불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혼인은 무산되고 맙니다. 하지만 '하이든'은 그녀의 두 아이를 평생 보살펴 줍니다. 음악을 지도하고 일자리를 주선해 주기도 합니다. '에스테르하지'가에서 태어난 그녀의 두번째 아이는 '하이든'의 아이가 아니냐는 소문이 공공연히 나돌았다고 합니다. '루이지아'조차도 둘째 애가 '하이든'의 핏줄임을 인정했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하이든'만은 끝내 자신의 자식임을 부정했다고 하는군요. 두 남녀의 만남은 1791년 '루이지아'가 이탈리아로 돌아가면서 끝나게 되는데, 헤어진 후에도 '하이든'은 유서에 '루이지아' 앞으로 유산까지 남기지만 여자의 마음은 갈대인 것인지 그녀는 곧 누군가와 결혼해 버렸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유서에는 그녀 말고도 첫사랑인 '테레제'도 언급되어 있었다고 하니 그에게 첫사랑은 참 끈질긴 추억이자 아픔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대로 된

음악 스승조차 만나기 쉽지 않았던 환경 속에서

클래식 음악의 일가를 이룬

'하이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음악을 공부했다기 보다는

많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나의 음악지식과 능력은

개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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