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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편에서 이어집니다.

 

8. 헨델의 어린시절 : 아버지의 반대 - '아돌프' 공의 후원 - 스승 '차코브'의 헌신

헨델은 독일 '할레(Halle)'에서 1685년 2월 23일, 이발사인 아버지, '게오르크 헨델'(Georg Händel, 당시 63세, 1622~1697)과 그의 재혼한 두번째 부인 '도로테아'(Dorothea)사이에서 늦둥이 아들로 태어난다. 헨델의 아버지는 독일 30년 전쟁 초기에 태어난 사람으로 산전수전 온갖 고생을 겪으며 살아 온 사람이라 자식들을 수입이 안정적이고 신분적으로도 대접받는 의사, 공무원, 법률가 등으로 키우기를 원했지 음악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헨델의 할아버지는 놋그릇 대장장이였고 외할아버지는 루터교회 목사였다. 가까운 조상 중에 음악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던 셈이다. 다만, 그의 어머니가 목사의 딸로서 아주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는 점이 결국은 헨델이 보여준 남다른 자선활동과 '메시아'같은 성가곡을 작곡할 수 있는 종교적 심성의 배경이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헨델이 사망한지 1년만인 1760년, 최초의 헨델 전기를 출간한 영국 학자, '존 메인워링'(John Mainwaring)은 헨델이 런던으로 가기 전까지의 어린 시절에 관해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헨델의 생년월일이나 몇몇 사건의 시간 순서에 오류가 있어 혼선을 주고 있지만 헨델을 직접 알고 지냈던 사람이 쓴 전기라는데 큰 의미가 있다. 그에 따르면, 헨델의 아버지는 헨델이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이 있음을 알고 음악의 길로 들어서지 못하도록 악기류에는 손도 못대게 했으며 악기가 있는 집에는 놀러가지도 못하게 하는 등 철저히 음악적 환경을 차단시켰으나 헨델은 다락방에 작은 건반악기를 숨겨두고 모두 잠든 깊은 밤중에 연습했다고 적고 있다. 그 옛날 유럽의 평민 집이 그다지 넓지도 않았을텐데  한밤에 건반 두드리는 소리를 어떻게 들키지 않았는지 약간 소설적인 냄새가 나는 이야기다.

그러나, 1692년 헨델이 7살 됐을 때 정식으로 음악을 공부할 수 있게 된 계기가 우연히 찾아온다. 아버지가 '할레'에서 남쪽으로 50여 킬로미터 떨어진 '바이센펠스'(Weissenfels) 궁정에서 공무원(시종)으로 일하는 큰아들 '칼'(Karl, 헨델 아버지의 첫째 부인 소생으로 헨델의 이복 형)을 만나러 가는 길에 헨델이 따라가게 된다. 아버지는 궁정에 가면 악기를 만질 기회가 생길 수 있다는 생각에 헨델을 떼어 놓고 가려 했지만, 헨델은 이복 형이 보고 싶다면서 아버지를 조르고 졸라서 동행하게 된다. 형이 보고 싶다는건 핑계였고 궁전의 좋은 악기를 연주해 보고 싶은 마음이 컸던게 확실하다. 결국 그곳에 머무는 동안 헨델은 건반악기를 몰래 연주하는 기회를 얻게 되고 이를 듣게 된 '바이센펠스' 궁정의 '요한 아돌프' 공은 헨델의 아버지에게 돈까지 쥐어 주면서 음악공부를 시켜보라고 설득한다.

(헨델에게 음악공부의 길을 터 준 '바이센펠스' 궁정의 '요한 아돌프' 공)

이렇게 해서 그처럼 완고했던 헨델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음악선생을 붙여주는 전기가 마련되는데, 아무리 천재라도 선생님 복은 필요하다. 헨델에게 첫번째이자 마지막 음악선생으로 초빙된 '할레'의 '마리아교회' (Marienkirche) 오르가니스트, '차코브' (F. W. Zachow, 1663~1712)는 헨델에게 바이올린, 오르간, 오보에 등 각종 악기 공부를 체계적으로 가르친 것은 물론이고 대위법 등 작곡이론 교육과 음악적 상상력 자극 훈련까지 시켜 준 매우 유능한 선생이었다. 헨델의 천재성을 간파한 그는 세속음악과 성가곡, 그리고 성악곡, 기악곡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모든 음악지식을 아낌없이 헨델에게 전수한다. 그는 독일 음악 뿐 아니라 이탈리아 음악에도 일가견이 있었는데, 나중에 헨델이 낯선 이탈리아에 가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차코브'의 가르침이 밑거름이 된게 아닌가 생각된다.

더구나 '차코브'는 헨델에게 연주와 작곡 연습기회를 주기 위해서 일부러 어린 헨델을 교회의 자기 자리에 세우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헨델은 '마리아 교회'에서 틈틈이 오르간을 연주할 수 있었으며 일찌감치 교회를 위한 칸타타를 작곡하기 시작한다. 헨델이 처음 작곡하기 시작한 나이가 9살 때라는 설도 있는데 악보가 남아있지 않아 확실친 않지만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작곡을 시작한 것만은 확실하다. 최초의 작곡으로 악보가 남아 있는 작품은 14살 때인 1699년의 '트리오 소나타(HWV387)'이다. 점차 헨델의 교회 활동은 많아졌고 지식과 경험이 축적되면서 몇년 후에는 스승인 '차코브'의 실력을 능가하게 된다. '차코브'는 천재의 재목을 진정한 천재로 다듬어낸 뛰어난 선생님이었다. 헨델도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스승이 돌아가신 후 그 유가족을 끝까지 보살피는 보은을 하게 되니 참으로 아름다운 사제관계가 아닐 수 없다.

9. 베를린 학습여행과 하노버와의 인연 - 아버지 사망으로 법학이냐 음악이냐 갈림길

헨델은 1696년경(11세) 잠시 고향 할레를 떠나 베를린에서 고명한 국내외 음악가와 귀족 후원자들을 만나 음악공부도 하고 연주솜씨도 선보이고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당시 헨델의 아버지는 건강이 매우 안좋아 장거리 여행이 어려웠다고 하니까 기록엔 없지만 어린 헨델의 이 장거리 학습여행에도 역시 '차코브'가 동행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헨델이 베를린에 머무는 동안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이자 나중에 '프로이센' 제국(현대 독일의 모태)의 초대 여왕이 되는 '소피아 샤로테'(Sophia Charlotte, 1668~1705)의 눈에 띈 것은 그의 음악여정에 또 하나의 중요한 전기가 된다. 그녀는 음악을 너무 좋아해서 스스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왕족들과 함께 직접 노래를 부르며 음악에 재능있는 사람을 만나면 신분을 따지지 않고 한 식탁에서 밥을 먹을 정도로 광적이었다고 한다. 그녀의 눈에 어린 헨델이 작곡까지 하면서 여러가지 악기를 연주해 내는 모습이 얼마나 대견스러웠을지 짐작이 된다. 또한 그녀는 '보논치니(Bononcini), '아리오스티'(Ariosti) 등 당대 최고의 이탈리아 작곡가들을 자주 초청했고 헨델은 외국의 대가에게 한 수 배울 수 있는 더할 수 없이 소중한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독일 방문 시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소피아 샤로테'(Sophia Charlotte)

재미있는 것은 이 '소피아' 선제후가 바로 전편에서 언급한 하노버 '루드비히' 대공의 친동생이었다는 점이다. 헨델이 하노버 궁정의 당시 카펠마이스터 '아고스티노 스테파니'(Agostino Steffani, 이탈리아 작곡가)와 안면을 익히고 나중에 장성해서 그의 후임 카펠마이스터로 고용되는 것도 모두 이런 인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게 '뉴먼 플라워'의 분석이다. '소피아' 선제후는 헨델을 이탈리아에 유학보내 공부시키기로 하고 헨델의 아버지에게 승락해 달라는 편지를 쓰는데, 일이 순조롭게 풀려서 헨델이 이 무렵 이탈리아에 가게 됐다면 아마도 그의 음악 인생은 또 아주 다른 모양으로 전개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당시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어 생명이 위독했던 헨델의 아버지는 아들의 이탈리아 유학을 사양하고 조속한 귀향을 요청한다.  해를 넘긴 1697년 2월, 헨델의 나이 12세에 아버지는 끝내 숨을 거두는데, 요즘의 아버지라면 그토록 일찌감치 음악에 대한 재능을 여러 귀족과 음악가들로부터 인정받은 아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이왕 들어선 음악의 길에서 크게 성공하라고 축복했을텐데, 그는 헨델이 법조인이 되었으면 한다는 자신의 오랜 바람을 끝까지 거두지 않고 죽는다. 12세 소년에게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과  쓸쓸히 남겨진 어머니 그리고 어린 두 여동생은 엄청난 심적 부담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이때부터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약 5년간 헨델은 시묘살이 하듯 고향에서 조용히 입시준비와 음악공부를 병행한다. 일반 학과 공부를 중점적으로 하고 남는 시간에 음악을 공부하는 것으로 아버지의 유언도 지키면서 음악도 버리지 않는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이다. 그가 과외시간에 음악을 연주하고 공연할 수 있도록 곁에서 도와준 사람도 스승 '차코브'였다고 한다. '텔레만' 편에서 언급한 것처럼, 20세의 청년 텔레만은 음악공부를 접고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라이프치히로 가는 도중  할레에서 1701년 16세의 헨델을 만나 평생 친구가 되는데, 그가 자서전에서 헨델을 만나 상당히 마음이 흔들렸다고 기록한 것은 바로 헨델이 자기처럼 음악을 완전 포기하지 않고 음악과 일반 학과공부를 병행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텔레만이 대학 입학 후 헨델처럼 슬슬 법학공부와 음악을 같이 하다가 결국 음악가의 길로 들어 선 것은 헨델의 영향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헨델의 아버지, Georg Händel)

 

10. 잠시 법률공부로 효도한 후 함부르크에서 헨델다운 음악인생을 시작하다

17세가 된 1702년 헨델은 드디어 할레 대학에 입학함으로써 일단 아버지의 소원을 풀어 드린다. 그가 법학과에 정식 등록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법학과목을 수강한 것은 맞다고 한다. 그러나 헨델의 음악으로부터의 일탈과 효도는 거기까지였다. 그는 1703년 성년이 되면서 '할레'의 대성당인 '돔' 교회(Domkirche)의 1년짜리 오르가니스트 인턴으로 채용된다. 그의 첫 직업이었다. 그 다음부터 그의 법률공부에 대한 이야기는 더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헨델이 음악가로서 할레에 머문 기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돔' 교회에서 일한지 얼마 안되어 슬그머니 함부르크로 여행을 떠나더니 거기 그냥 눌러 앉아 버린 것이다. 함부르크로 가게 된 이유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으나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어느정도 유추가 된다.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할레'의 종교적 교파간 다툼 때문인 것 같다. '돔' 교회는 칼빈파였기 때문에 루터파 교회들과 많은 갈등을 빚었고 루터교도인 헨델도 이런 싸움에 휘말리기 싫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이 무렵 교회 성가곡보다는 세속적인 음악에 더 흥미를 느꼈고 특히 오페라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헨델의 이런 취향이 그가 만났던 이탈리아 작곡가들과 텔레만의 영향에서 비롯된게 아닌가 추측한다.

헨델의 함부르크 여행은 그가 나중에 영국으로 건너가 오페라에 전념하게 된 시발점이 됐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깊은 전환점이었다. 1703년경에는 베를린이 음악도시로서의 명성을 많이 잃어버린 대신 함부르크가 새로운 음악도시로 떠오른 상황이었다. 함부르크에는 그 무렵 귀족의 궁정무대가 아닌 일반 대중을 위한 독일 최초의 오페라 하우스, '오페르 암 겐제마르크트"(Oper am Gänsemarkt)가 설립됐는데, 이는 입장권 판매 수익으로 운영되는 형태의 민간 오페라 극단이었고 헨델이 나중에 영국에서 설립하게 되는 '왕립오페라극단'의  전형이었던 것이다.

헨델은 처음엔 이 오페라 극단의 바이올린 연주자로 함부르크 생활을 시작하지만, 1706년 이탈리아로 가기 전까지 3년정도 머무는 동안 그의 꿈이었던 오페라 작곡에 입문하여 '알미라'(Almira) 등 4편의 오페라를 공연하는데 성공한다. 헨델의 함부르크 음악활동 시절에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요한 마테존 (J. Mattheson) 이다. 작곡가이자 연주자이고 오페라 가수이기도 했던 '마테존'은 헨델이 함부르크에서 사귄 첫 친구로서 그의 초기 숙식 문제서부터 오페라 하우스 취직과 나중에 오페라 공연까지 여러모로 도움을 주고 협력한 사람이다. '마테존'은 오지랍이 넓은 성격이어서 시골에서 갓 올라온 헨델에게 먼저 다가가서 각종 편의를 제공했을 가능성이 크다.

(헨델과 마테존의 결투)

 

헨델과 '마테존'의 관계에 대해서는 두사람이 진검을 가지고 결투했다는 에피소드가 침소봉대되어 전해지면서 헨델의 성격이 다혈질이었다느니 이 결투 때문에 두 사람은 평생 막역한 친구로 지내게 되었다느니 하는 왜곡된 이야기가 항간에 널리 퍼져 있는데 이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  '뉴먼 프라워'의 전기에 기록된 내용이 비교적 정확한 진실로 평가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두 사람의 결투는 1704년 '마테존'이 작곡하고 배역을 맡아 노래까지 한 오페라 '클레오파트라'(Cleopatra) 공연 때였다고 한다.

이 공연에서 헨델은 하프시코드 연주를 맡았는데 원래의 약속은 '마테존'이 자기가 맡은 배역의 인물이 사망한 다음엔 헨델로부터 하프시코드를 넘겨 받아 직접 연주한다는 것이었다. '마테존'은 욕심도 많았던 것 같다. 처음 몇차례의 공연은 약속대로 잘 진행이 되었는데, 12월 5일 열린 공연에서 헨델은 웬일인지 하프시코드를 넘겨주지 않고 계속 연주를 진행했고 '마테존'은 화가 나서 공연 도중인 것도 아랑곳없이 헨델에게 심한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으며 공연을 아예 중단하고 거리로 나가 진검 결투를 벌이게 된다. 관중들은 오페라보다 더 재미있는 싸움 구경을 보너스로 볼 수 있게 됐다고 좋아하면서 거리로 운집했으나 결투는 싱겁게 끝나고 만다. 성질에 못이긴 '마테존'이 먼저 헨델의 가슴에 칼을 냅다 찔렀으나 금속단추에 적중한 칼이 부러져 버렸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며칠 후 화해했다고 하는데, 신문기자들이 헨델에게 왜 하프시코드를 약속대로 넘겨주지 않았는지 끈질기게 물었으나 헨델은 죽을 때까지 묵묵부답이었다고 한다. '뉴먼 플라워'는 아마도 당시 헨델이 제자로 삼았던 어느 귀족의 아들에 대한 가정교사 자리를 '마테존'이 슬그머니 뺏어간데 대한 서운함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또 "헨델의 성격은 폭력과 거리가 먼 사람인데 이런 결투에 휘말리게 된 것은 너무 이상한 일이었다"라면서 '마테존'은 헨델의 뛰어난 능력을 시기해서 헨델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행동을 많이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두 사람은 마음으로부터 강한 우정을 나눈 친구사이라기 보다는 친한 척 하면서 적당히 거리를 유지한 동업자 관계라는게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단순한 오지랍과 시기심은 결코 진정한 친구를 만들 수 없다는 교훈을 느낀다.

11. 이탈리아에서 오페라 '아그리피나'의 대성공과 하노버 궁정악장을 거쳐 영국으로

할레에서 함부르크로 갈 때처럼 헨델은 1706년 불현듯 이탈리아로 떠난다. 주변 사람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훌쩍 떠났기 때문에 이탈리아로 가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어떤 경로를 통해 이탈리아에 도착했는지 아무런 기록이 없다. '마테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는건 그와의 우정이 별 볼일 없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다만, 이탈리아 '피렌체'(Florence)를 중심도시로 하는 투스카니(Tuscany) 지역의 대공 '쟌 가스토네 데 메디치'(Gian Gastone de' Medici)가 함부르크를 방문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의 초청을 받지 않았겠는냐는게 일반적인 추측일 뿐이다.  일부 문헌에선 '가스토네'의 형인 '페르디난도'(Ferdinando de' Medici)의 초청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그는 독일을 방문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이탈리아에 3년 정도 있는 동안 피렌체, 로마, 나폴리, 베네치아 등 여러 도시를 돌면서 유명 작곡가들과 교류하고 각 도시 특색에 맞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들을 작곡한다. 피렌체와 베네치아에서는 오라토리오와 오페라, 로마에서는 수백 곡의 칸타타 등 교회 성악곡을 작곡해 차츰 명성을 얻게 되는데 그가 작곡한 1707년의 '로드리고'(Rodrigo, 피렌체 초연)와 1709년의 '아그리피나'(Agrippina, 베네치아 초연) 등 두편의 오페라는 헨델의 이름을 유럽 전역에 퍼지도록 만든다. 특히 로마제국 네로 황제의 어머니 '아그라피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오페라 '아그리피나'는 27일간 연속 공연이라는 당시 베네치아 음악계에서도 보기 드문 기록을 세우는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특히 독일 하노버의 '루드비히' 대공의 동생, '에른스트' 공이 이 오페라를 관람한 후 헨델을 자기네 궁정의 카펠마이스터로 초빙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한다. 또 공교롭게도 '에른스트' 공은 영국의 베네치아 대사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헨델이 나중에 영국으로 가는데도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오페라 Agrippina 악보 원본 표지)

 

베네치아는 '사계'의 작곡가 비발디의 고향이자 활동 무대였는데 당시 바로크의 대작곡가들이 베네치아에서 서로 만나는 인연은 없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두 사람이 서로 조우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헨델보다 7살 많았던 비발디에게 1709년은 카톨릭 신부 서품을 받고 '삐에따' 보육원에 취직한지 6년 정도 된 시점으로 자작곡 앨범을 2집까지 출간하여 아직 그다지 대외적인 명성을 크게 얻지 못했을 때였다. 비발디가 국제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1711년 제3집 앨범이 네덜란드에서 출간되면서부터이니까 만일 헨델이 2년만 더 베네치아에 머물렀다면 그토록 오페라를 좋아했던 비발디와 만났을 가능성은 매우 높았을 것이다. 평생 부인도 없이 오페라에 온갖 정열을 쏟고 간 두 사람이니 얼마나 통하는게 많았을까.

함부르크에 헨델의 친구이자 동업자이고 라이벌인 '마테존'이 있었다면 이탈리아엔 '도메니코 스카를라티'(Domenico Scarlatti, 1685~1757)가 있다. 헨델과 동갑인 나폴리 출신의 '스카를라티'는 당대 최고의 하프시코드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이탈리아에 처음 도착한 헨델을 여러모로 도와준 친구이다. 누가 더 잘 났는지 비교해 보기 좋아하는 사람들 때문에 헨델과 '스카를라티'는 하프시코드와 오르간 실력을 공개리에 대결했는데 누가 어떻게 평가했는지는 모르지만, 하프시코드는 '스카를라티'가, 오르간은 헨델이 더 우수했다는 소문이 전해지고 있다. 헨델보다 하프시코드를 잘 연주했다던 '스카를라티'는 런던에서 다시 헨델을 만나 우정을 나누기도 하고 말년엔 스페인에서 활동하다가 죽는다.

헨델이 이탈리아 생활을 마치고 하노버 궁정악장으로 부임한 것은 1710년 6월경. 가까운 시일내에 1년간 런던으로 휴가를 갈 수 있도록 허락한다는 조건 하에 고용계약을 체결했다는 설도 있으나 확실친 않다. 아무튼 헨델은 8월에 하노버를 떠나 할레와 뒤셀도르프를 들러 개인 일을 본 후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으로 건너간다. 그가 하노버에 있는 두 달 동안 한 일은 이탈리아에서부터 준비했던 칸타타 '아폴로와 다프네'(Apollo and Daphne)의 작곡을 마친 것 정도이다. 이 세속 칸타타는 그리스 신화를 내용으로  서곡, 아리아 등 총 20여곡으로 이뤄진 대작이다. 그 후 헨델이 영국에서 자리잡게 된 이야기는 전편에서 언급한 그대로이다.

(하프시코드 연주대결에서 헨델을 이겼다는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12. '빠삐용'(Papillon, 나비)처럼 자유로운 영혼 - 위트와 품이 넉넉한 자선사업가

헨델의 성장과정을 쭉 살펴보면 대충 그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한마디로 그의 성격을 표현하라면 빠삐용과 같은 '자유로운 영혼'이라 할 수 있겠다. 그는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삶의 목표로 삼는 핵심 주제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되 누군가에게 매어 있는 속박을 매우 싫어한 것 같다.  당대의 바로크 작곡가들, 텔레만, 바흐, 비발디 처럼 어떤 교회나 궁정에서 월급을 받으면서 일하라고 했으면 오늘날의 헨델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대체로 주종관계 또는 갑을관계였던 독일 음악계는 헨델의 적성에 맞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한 곳에서 현실에 안주하기 보다는 마음에 안 드는 곳은 미련없이 훌쩍 떠날 수 있는, 빠삐용의 날개처럼 영혼이 자유로운 사람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헨델이 '마테존'과 결투한 사건과 말 안 듣는 오페라 가수를 창문으로 집어 던지려 했다는 이야기가 부각되고 있어서 그가 불같은 성격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는 결코 다혈질이 아니라 위트가 많고 느긋하며 관대하다는게 정확한 평가라고 한다. 1720년대 런던의 제1차 '왕립오페라극단' 시절,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소프라노 가수 '프란체스카 쿠초니'(Francesca Cuzzoni)가 오페라 리허설 중 아리아 한 곡이 원래 다른 가수를 위해 작곡된 것이라면서 부르기를 거부하자 헨델은 그녀를 번쩍 들어 창문 밖으로 내던져 버리겠다고 협박해서 굴복시켰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그의 성질이 못됐다는 증거라기보다는 갑질하는 부당한 행동에 단호히 대처하는 리더십을 발휘한 것으로 봐줘야 하지 않을까. 더구나 이 '쿠초니'란 여인은 결국 1727년 '아스챠나테'(Astianatte)란 오페라 공연 도중 상대역 가수와 난투극을 벌인 바로 그 주인공이 되었으니 헨델은 좀더 심한 행동으로 그녀의 버릇을 완전히 고쳐 놓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문헌을 통해, 헨델이 했다는 유머러스한 말들이 간간이 전해지고 있는데 어떤 전기 작가는 "헨델이 영어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의 영어가 본토인 수준이었다면 아마도 그의 유머는 당대의 최고 유머리스트로 인정받는 '조나단 스위프트'를 능가했을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의 1750년 초연작 오라토리오 '테오도라'(Theodora)는 현대에 이르러 대단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으나 당시엔 흥행에 실패한 작품이었다고 한다. 주변에서 그를 위로하자 "'테오도라'는 기독교 이야기라 유대인 관객이 빠졌고, 정결한 여인의 이야기라 여성 관객이 안왔으니 실패한게 당연하겠지요"라고 조크했다고 한다. 또 누군가 '메시아' 무료 초대권을 달라고 하자 "'메시아'말고 '테오도라'를 관람하시는게 어때요. 자리가 많아서 춤을 춰도 충분하답니다"라는 농을 건넸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이미 여러번 언급했지만, 헨델이 자선활동에 열심이었던 것도 이런 성격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기독교적인 DNA가 그 배경에 깔려 있음은 더 말할 것도 없겠지만, 자비심이란 관용과 배려, 영혼의 자유와 마음의 넉넉함에서 나오는 것일테니까 말이다.  그는 공연 수익의 부정기적인 기부활동 외에도 어린이 보육원 '파운들링 호스피탈'의 강력한 후원자였을 뿐 아니라, 생활이 어려운 음악인들의 지원기관인 "은퇴음악인 기금'(Fund for Decay’d Musicians)을 창설해 운영하기도 했다. 영국에는 지금도 이 기관이 모태가 된 '왕립음악가협회' (Royal Society of Musicians)가 있어서 가난한 음악인의 생계를 지원하고 있다고 한다.

13. 헨델의 귀화는 음악활동에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헨델의 귀화 이야기로 돌아와 지금까지의 긴 이야기를 마무리해 보자. 사실 필자는 헨델이 영국의 자연과 사람과 문화를 너무 너무 사랑해서 국적까지 바꿔버린 것은 아닌가 하고 비슷한 증거를 찾아 보려고 애썼지만 그런 내용의 기록은 발견할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헨델은 우리가 익히 살펴본 것처럼 영국이 그의 음악에 대한 꿈과 열정을 독일에서보다 좀 더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환경과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영국에 눌러 살게 된 것이며, 영국 국적을 취득한 것도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 보다는 단지 영국에서 음악활동을 하는데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이유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헨델은 1719년 제1차 '왕립오페라극단'을 설립해 운영하던 중 1723년 영국 왕 '조지 1세'로부터 왕실교회(Chapel Royal)의 전임 작곡가로 임명받게 된다. 문제는 왕녀들의 음악선생 역할까지 위촉받게 되는데 당시 법규 상 외국인은 왕실에서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귀화를 신청하게 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인 것 같다.  '헨델과 영국 왕실교회'(Handel and English Chapel Royal)라는 책을 쓴 '도널드 버로우즈'(Donald Burrows)는 당시 오페라 계의 분위기 상 헨델이 영국 관객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서는 외국인이란 이미지를 씻어버릴 필요가 있었으며, 국왕이 전임자 '윌리엄 크로프트'(William Croft)의 후임으로 지명한 왕실 작곡가의 자리를 통해 자신의 영국 내 입지를 좀 더 탄탄히 해둘 필요성이 있었을 것으로 분석한다. 더구나 이 자리는 다른 일을 겸업하면서 수행할 수 있고, 과거 '앤' 여왕으로부터 받은 연금 200 파운드 외에 추가로 200 파운드의 연봉을 받을 수 있어 재정적으로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것 같다.

당시 영국법에 따르면 외국인의 귀화 절차는 상당히 까다로왔다. 우선 '영국 성공회'(Anglican Church, 또는 Church of England)에 입교하여 국가와 군주에 대한 충성서약을 한 후 영국 의회에 귀화 청원서를 제출하면 의원들이 본인을 출석시켜 면접심사를 거쳐 귀화법안을 상정하고 이 법안이 심의 통과되면 최종적으로  영국왕의 재가를 끝으로 귀화가 결정되는 것이다. 당시 헨델의 귀화를 내용으로 한 법안, '헨델 귀화법' (Handel's Naturalisation Act)은 1727년 2월 20일, 국왕 '조지 1세'의 서명으로 효력이 발생되었다. 헨델은 바로 이 날짜부터 법적인 영국인이 된 것이다.

14. 헨델이 남긴 무수한 명작들

헨델은 이상과 같은 글로벌한 음악 여정을 통해 오페라 46곡, 오라토리오 29곡, 칸타타 등 성악곡 120여곡과 기타 수상음악, 실내악, 송가 등 모두 700여곡의 작품을 남겼는데 많은 바로크 음악가들이 수백년간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졌던 것과 달리 헨델 음악은 사후에도 꾸준히 연주됐으며 그 중엔 오늘날까지 연주되고 공연되는 작품이 '메시아' 말고도 많다는 점에서 그는 대단히 복 받은 작곡가라 할 수 있다. 이는 그가 독일이나 이탈리아가 아닌 영국에서 활동을 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헨델과 끈끈한 연을 이어 온 영국 왕 '조지 1세'는 '헨델 귀화법'에 서명한 후 얼마 안 있어 느닷없이 사망한다. 그는 수시로 고향인 독일 하노버에 가서 지내곤 했는데 그해 6월 하노버로 여행하던 도중 독일 어느 도시에서 뇌졸중으로 숨을 거두게 된 것이다. 영국의 왕위는 '조지 1세'의 아들로서 역시 독일 하노버 태생인 '조지 어거스터스'(George Augustus) 즉, '조지 2세'에게로 이어진다. 헨델은 10월에 거행된 '조지 2세'와 왕비 '캐롤라인'의 대관식에서 축가를 작곡해 연주하는데 이 작품이 바로 그 유명한 '대관식 송가'(Coronation Anthems)이다.

이 '대관식 송가'(Coronation Anthems)는 헨델이 직접 성경 구절에서 발췌한 내용으로 가사를 만들고 작곡한 여러 곡의 합창, 중창, 독창을 포함하는 4개의 곡으로 이뤄져 전체 연주시간이 40분정도 되는 대작이다. 그 중에서도 제1곡인 '사독 대제사장'(Zadok the Priest)은 특히 유명하다. '사독'은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에게 기름을 부은 대제사장이다. 헨델의 이전과 이후에도 수많은 대관식 송가가 작곡되었지만, 전통적으로 헨델 이후의 모든 영국 왕 대관식은 반드시 이 '사독과 대제사장'의 합창으로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국인들은 이 곡이 영국의 국가인 줄 착각하기도 한다.

(헨델의 Zadok the priest)

'사독 대제사장'(Zadok the Priest)은 세계적인 웹진 '클래식 FM'이 2016년 헨델의 331회 생일을 기념해 선정한 '헨델의 10대 명곡' 중 제1위를 차지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 10곡에는 오페라 '세르세'(Serse) 중 오프닝 아리아 '옴브라 마이 푸'(Ombra mai fu), 오페라 '솔로몬'(Solomon)  제3막의 서곡 신포니아 '시바 여왕의 도착(The Arrival of the Queen of Sheba), 오페라 '리날도'의 아리아 '나를 울게 하소서'(Lascia ch'io pianga), '합주협주곡 작품 6, 제6번'(Concerto Grosso Op.6 No.6) 등이 포함되고 있다. 물론 이 10곡의 선정에는 음악전문가들의 개인적 취향이 작용했겠지만, 헨델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선 꼭 들어 봐야 할 곡들인 것 같다.

또 '클래식 FM'은 헨델이 만년에 작곡한 작품 가운데 명작으로 오라토리오 '메시아'(Messiah), '제프타'(Jephtha)와 더불어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Music for The Royal Fireworks)을 꼽고 있다. 이 곡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의 종전을 축하하기 위해 역시 '조지 2세'의 주문으로 1749년 만든 작품이다. 왕실의 '초록공원'(Green Park)에서 열린 이 작품의 초연엔 1만 2천명의 관객이 참석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헨델의 수상음악 모음과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

 

15. 에필로그 - 음악을 위해서만 살다가 웨스트민스터에 잠들다

헨델 이야기 가운데 미스터리는 남녀 관계의 에피소드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결혼을 두번 씩 했던 바흐와 텔레만은 그렇다쳐도 카톨릭 신부였던 비발디마저 오페라 가수와의 염문설이 늘상 따라 다녔는데 이상하게도 헨델에 관해서는 한토막의 여자 이야기도 전해지지 않는다. 왜 그는 평생 혼자 살았으며 흔한 스캔들조차 없을까. 헨델이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젊은 시절, 16살 연상의 오페라 가수 '비토리아 타르키니'(Vittoria Tarquini)와 썸을 탄 것 같다는 주장도 있지만 별 근거없는 얘기로 치부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사람은 헨델이 동성애자가 아닐까 의심하기도 한다.  이들은 특히 헨델을 후원했던 '메디치'가의 귀족 형제, '페르디난도'(Ferdinando)와 '가스토네'(Gastone)가 모두 동성애자로서 자식을 두지 않아 이탈리아 명문 '메디치'가의 가계를 끝장 낸 장본인들이었다는 정황을 증거를 들이댄다. 그러나 대부분의 헨델 전기 작가들은 말한다. "헨델은 오직 음악을 위해서만 산 사람"이라고. '뉴먼 플라워'는 그의 헨델 전기에서 "그의 음악은 곧 그의 삶이었다. 어떤 여자도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으며 공유할 수도 없었다. 음악은 그가 남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그로부터 빨아들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헨델은 비교적 건강한 편이었다. 그가 작곡을 안하고 그냥 지낸 기간은 거의 없다. 여행 중이거나 요양 중일 때를 제외하곤 늘상 곡을 만들어냈다. 그가 작곡을 할 수 없었던 가장 오랜 기간은 1737년 갑자기 손가락에 마비가 왔을 때였다고 한다. 그는 독일의 '아헨'(Aachen) 온천에 가서 몇 달 휴양한 후 다시 하프시코드를 연주할만큼 회복됐다고 하는데 이런 증상은 1743년에도 한차례 더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얼핏 뇌졸중에 의한 마비가 아닐까 생각되는데 현대 의학전문가들은 아마도 헨델이 가벼운 납 중독에 걸렸던 것이 아닌가 분석하고 있다. 왜냐하면, 헨델은 당시 포르투갈에서 수입되는 고알콜 와인을 정기적으로 마셨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는데 그 와인은 알콜 도수를 높이기 위한 증류 시스템의 납 파이프에 오염됐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라고 한다. 온천에서 휴양하면 좋아진 이유는 온천이 좋아서라기 보다는 거기 있는 동안 포르투갈 와인을 마시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

또 헨델에 관해 널리 알려진 사실 중 하나가 바로 수술 부작용에 의한 실명 사건이다. 바흐와 1년 사이를 두고 '테일러'라는 동일한 돌팔이 의사에게 1751년 안과 수술을 받은 후 한쪽 눈부터 시력이 떨어지면서 얼마 후엔 완전 실명하게 된다. 그러나 헨델은 실명 후에도 작곡을 멈추지 않는다. 평소처럼 많은 곡을 쓰지는 못했지만 간간이 작품을 발표한다. 그는 1757년 그동안 써 왔던 오라토리오를 보완 개작한 마지막 작품, '시간과 진실의 승리'(The Triumph of Time and Truth)라는 제목의 오라토리오를 남기고 1759년 4월 14일 아침, 74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어간다.

바흐나 텔레만의 장례식에 관해 별로 남아 있는 기록이 없고 비발디의 경우는 아예 유해가 어디에 안장되어 있는지도 모르는 것과 달리, 헨델의 장례식은 3천명의 조문객이 참석하여 국장에 버금가는 거창하고 융숭한 방식으로 치러졌다. 영국의 국장 장례식에서 주로 연주되는 '윌리엄 크로프트'의 진혼곡이 연주되었다. 이 진혼곡은 근대에 들어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엘리자벳 여왕의 어머니 장례식에서도 연주된 바 있는 곡이다. 그리고 헨델의 유해는 영국 왕실의 대관식, 결혼식 등이 열리고 왕족과 유명인사들이 죽어서 묻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y)에 안장되었다. 만유인력의 '아이작 뉴턴' 경과 얼마전 작고한 '스티븐 호킹' 박사가 묻힌 바로 그 곳이다.

(헨델 묘지의 기념비, 웨스트민스터 사원)

 

악성 베토벤은
헨델의 음악을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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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고 싶다면
헨델에게 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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