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반응형

하이든 상편에서

이어집니다.

 

4. 부모에게 음악적 재능만 물려 받은 '하이든'

'하이든'은 1732년 3월 31일 오스트리아 동쪽 국경 근처의 '로라우'(Rohrau)에서 태어났습니다. 요즘도 인구가 1,600여명에 불과한 아주 작은 마을에서 마차 바퀴를 만들고 수리하는 일을 하는 가난한 아버지와 요리사 출신 전업주부 어머니 사이에서 12남매 중 둘째 아이자 장남으로 태어난 겁니다. 그의 교회 세례자 명부에는 4월 1일 세례를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보니 그의 생일이 4월 1일일 수도 있다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으나 하이든은 "내 생일이 만우절이라면 너무 끔찍한 일이죠. 내 생일은 3월 31일이 분명합니다"라는 얘기를 자주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1732년은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과 바흐의 5째 아들이자 작곡가인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바흐'가 태어난 해이기도 합니다.

('비엔나'에서 동쪽으로 50킬로미터 떨어진 '로라우'와 어린시절을 보낸 '하인부르크', 슬로바키아 국경과 매우 가깝다)

 

 ('로라우'의 하이든 생가, 하이든이 6세까지 살았다, 하프를 연주하는 아버지 옆에서 바이올린 연주 흉내를 내는 하이든)

'하이든'의 아버지는 일이 끝나면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서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는 악보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젊은 시절 떠돌아 다니며 어깨너머로 배운 하프를 가지고 민속음악을 연주하고 노래하는 남다른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런 분위기 탓인지 '하이든'은 일찌감치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을 드러냅니다. 맑고 고운 목소리로 아버지 옆에서 노래를 따라 부르고, 나무조각을 바이올린 비슷하게 깍아서 - 물론 소리는 나지 않지만 - 마치 노련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리듬에 맞춰 실제 연주하듯이 활을 움직이는 모습에 마을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린 '하이든'을 '로라우'같은 깡촌에서 좀더 넓은 음악세계로 인도해 낸 몇몇 사람이 없었다면 오늘날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겁니다. '하이든'의 고운 노래소리와 가짜 바이올린 켜는 모습을 보고 그의 음악적 재능을 처음 확신한 사람은 그의 먼 친척 형이면서 '로라우'에서 1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하인부르크'(Hainburg)에서 합창단 교사로 일하던  '요한 프랑크'(Johann Frankh)였습니다. '프랑크'는 '하이든'을 자신이 데려다가 음악공부를 시켜보겠다고 '하이든' 부모를 졸라서 승락을 받습니다. 어려운 살림에 먹는 입을 줄이고 공부까지 시켜준다고 하니 불감청 고소원이 아니었을까요. 이렇게 해서 6살 어린 나이에 가난한 부모 곁을 떠나 궁벽한 '로라우'보다는 꽤 큰 마을인 '하인부르크'에서 노래를 배우고 하프시코드, 바이올린 등 진귀한 악기들을 만질 수 있게 된 '하이든'으로서는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 온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이든'의 어린 시절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만년에 '하인부르크' 시절을 회상하면서 "나는 '프랑크' 형이 음악교육을 위해 나를 매우 혹독하게 다룬데 대해 평생 감사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밥을 먹는 것보다 더 자주 매를 맞곤 했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프랑크'는 교육방식이 무척 엄격했다고 합니다. 이유 없는 아동학대는 아니었겠지만 어린이가 견디기는 결코 쉽지 않은 체벌을 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프랑크'의 부인도 그다지 살뜰한 편이 아니어서 어린 시동생 '하이든'이 뭘 먹는지 뭘 입는지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형수의 무관심으로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는 가운데 형으로부터는 혹독한 매질을 당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 '하이든', 그는 어떻게 그리도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고 음악과 삶 속에서 평생 해학과 여유를 보여줄 수 있었을까요.

5. 비엔나에서 '성 스테판' 성당의 소년 합창단원으로 음악기초를 쌓다

'하인부르크'에서 2년정도 지낸 어느날 '하이든'에게는 또 하나의 기회가 찾아 옵니다. 비엔나 '성 스테판' 성당의 '카펠마이스터'(Kapellmeister, 음악장),  '게오르크 폰 로이터'(Georg von Reutter)가 '하인부르크' 교회의 목사인 친구를 만나러 왔다가, '성 스테판' 성당에서 소년 성가대원을 구하고 있다는 말을 흘렸고 그 친구 목사는 그 자리에 '하이든'을 추천합니다. '로이터'는 '하이든'을 불러서 무릎에 앉히고 "너 떨림음 노래를 할 수 있니?"라고 묻습니다. 꼬마 '하이든'은 "못 부르는데요. 아마 '프랑크' 형님도 못 하실걸요"라고 대답하자  '로이터'는 그의 솔직함에 껄껄 웃으면서 '하이든'의 재능을 자세히 테스트해 본 후 비엔나로 데려갈 것을 결정합니다. 시골 개천의 조그만 피라미가 드디어 큰 바다를 만난 셈인데요, 이제 그의 앞길은 활짝 열린걸까요.

'하이든'은 비엔나 '성 스테판' 성당에서 소년 성가대원으로 약 9년간 지내면서 일반 인문학 뿐 아니라 악기와 음악이론, 그리고 약간의 작곡법을 공부하게 됩니다. '성 스테판' 성당의 소년 성가대원은 예배 때 정기적으로 성가를 부르는 외에 장례식이나 왕실의 특별 행사에 참석하곤 했는데 특히 당시 '왕립 소년합창단'과의 연합 공연이 많았다고 합니다. 1498년 '합스부르크' 왕가가 창설한 이 '왕립 소년합창단'은 오늘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전통과 역사의 바로 그 '빈 소년 합창단' (Vienna Boys' Choir)의 전신입니다. '하이든'은 원래 여기에 소속된 것은 아니었지만 자주 함께 공연하다 보니 '빈 소년 합창단' 대원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빈 소년 합창단' 기록에 따르면, '하이든' 뿐 아니라 '쌀리에리', '모차르트', '슈베르트', '브루크너' 등 쟁쟁한 음악가들이 어렸을 적 합창단원으로 참여했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성 스테판' 성당에서 지내는 동안 '하이든'은 작곡가로서의 기초를 배우기는 하지만 그다지 체계적인 작곡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음악전문가들은 '하이든'이 당시 정규교육을 통해 배운 것 보다는 전 유럽의 음악공연 중심지라 할 수 있었던 비엔나의 '성 스테판' 성당'에서 일을 함으로써 최신의 음악 트렌드와 아이디어, 예술감각 등을 몸으로 익힐 수 있었고 그 것이 나중에 더 큰 도움이 되었다고 분석합니다. 역시 사람은 큰 물에서 놀아야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캐치하고 새로운 동기부여를 얻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이든'의 초년운세는 여전히 혹독해서  이 곳에서도 그다지 풍족하고 행복하게 지내진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당시 귀족들이 장례식 등 행사에 소년합창단을 초청하면 상당히 비싼 공연료를 지불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성당 측은 돈 받은만큼 아이들을 넉넉히 먹이고 입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카펠마이스터 '로이터'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아이들의 복지에는 무신경했습니다. '하이든'은 이 시절에 대해 "내가 노래를 열심히 연습한 것은 귀족잔치에 초대 받아서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얻어먹기 위해서였다"고 회상합니다. 요즘 같으면  아동 임금 착취는 아니었나 모르겠습니다.

이 무렵 '하이든'은 '카스트라토'가 될 뻔한 위기를 겪기도 합니다. '로이터'가 '하이든'을 아예 거세시켜서 '카스트라토'로 만들고 예쁜 소프라노 목소리를 영구 보존하면 어떻겠느냐고 '하이든'의 아버지에게 제안한 것입니다. 아슬아슬한 순간에 다행이 아버지가 반대의사를 분명히 함으로써 거세는 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1749년 무렵, '하이든'에게 결국 변성기가 도래하고 새로운 위기를 맞습니다. '하이든' 당시의 황제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군주인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a)'였는데, 그녀와 '하이든'의 관계는 악연에 가깝습니다. '하이든'이 '쇤부른' 궁전에서 공연 후 정원에 설치된 단두대 근처에서 놀다가 황제의 눈을 거슬러 호된 야단을 맞는가 하면, 변성기가 시작됐을 때는 공연 도중, "저 아이 목소리는 수탉 우는 소리"라는 황제의 핀잔 때문에 바로 소년 합창단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기록에 따르면, '하이든'이 쫓겨난 결정적 이유는 합창단 동료 소년의 댕기머리를 가위로 잘랐고 그 때문에 화가난 '로이터'가 매질을 한 후 길 밖으로 내쫓았다고 하는데, 아마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그가 여전히 예쁜 목소리만 갖고 있었다면 결코 쫓아내지는 않았을 겁니다. 아무튼, 이제 나이가 차서 소년 합창단원으로 계속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막상 '성 스테판' 성당을 나온 17세 소년 '하이든'은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했을 듯 싶습니다. 그동안 고향을 떠나 불철주야 노래하고 음악공부만 한 10여년을 돌아 보면서, 풍족하게 먹고 입지도 못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 받은 것도 없이 어쩌면 이용당하기만 한 것 같은 비참한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요.

6. 해학과 유머의 '파파 하이든' - 그의 넉넉함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러나 '하이든'은 자신의 작은 불행에 좌절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동안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음악을 공부할 수 있었던데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더 크게 간직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요. 그 이후 '하이든'에게는 그의 음악적 성취에 도움을 주는 인사들이 연달아 등장하게 됩니다. 어린 시절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성은 전혀 찌그러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30대 이후에는 아랫사람들로부터 '파파 하이든(Papa Haydn)'이란 칭호로 불리게 됩니다. 음악계 후배들이나 '하이든'이 관장하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자기들을 마치 아들처럼, 동생처럼 보살펴 주고 아껴주는 그의 넉넉한 마음씨에 대한 존경과 애정의 표현으로 그렇게 부르곤 했다고 합니다.

특히 '하이든'을 '파파'라고 부르면서 제일 따르던 작곡가가 바로 '모차르트'입니다. 24년의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단순한 선후배 관계를 넘어서 사심없이 깊은 우정을 나눈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들은 만나기 전부터 서로 상대의 작품세계를 흠모했지만, 실제로 만나게 된 것은 1783년경이라고 합니다. '하이든'이 51세, '모차르트'가 27세 무렵이었습니다. '하이든'은 '모차르트'를 당대 최고의 작곡가로 추켜 세우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모차르트'는 '하이든'에게 자신이 작곡한 '현악 4중주' 6곡('하이든 4중주'라고도 불리는 Op. 10, No. 14~19)을  헌정하면서, "제 아들 6명을 보내드립니다. 얘들은 오래도록 갈고 닦은 제 노력의 결과물입니다. 얘들에 관한 모든 권리를 드립니다. 혹 결점이 보이더라도 너그럽게 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편지할 정도였습니다. 이 작품들은'하이든'이 정립한 4중주에 관한 틀을 적용한 것들로 당연히 '하이든'을 감동시켰고 두 사람은 이 곡들을 함께 직접 연주해 보면서 우정을 다집니다.

이처럼 '하이든'의 따뜻한 마음은 그의 말과 행동에서 뿐 아니라 그의 많은 작품에서도 해학과 유머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가 하는 농담이나 유머는 누군가의 희생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보통 개그맨들이 사람을 웃길 때에 남을 희롱하거나 비웃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이라도 비하하거나 하는 모종의 제물을 삼는 일이 다반사인데, '하이든'의 개그는 누구도 희생시키는 일 없이 오직 일반 사람들이 관행적으로 생각하는 부분을 예상치 못한 순간에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파고들어 사람들의 훈훈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식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명한 유머리스트들이면 반드시 겪게 되는 안티팬들의 악플이 '하이든'에 대해서는 전혀 없었다고 하는군요.

'하이든'의 이러한 해학적 사고는 그의 작품에도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전편에서 언급한 '고별고향곡(45번)', '놀람교향곡(94번)'에서 뿐 아니라 다른 작품들에서도 얼마든지 해학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의 익살은 느린 2악장의 조용한 음조 가운데 갑자기 강한 폭발음이나 바순(basoon)으로 내는 방귀소리를 집어 넣는다든지(교향곡 93번 2악장, 교향곡 94번 2악장), 연주가 끝난 것처럼 중간에 잠시 정적을 유지한다든지(교향곡 104번 3악장, 현악 4중주 30번 4악장), 연주자가 실수한 것처럼 의도적으로 박자나 음조를 이상하게 한다든지(교향곡 77번 3악장, 교향곡 80번 1악장), 동물의 울음 소리같은 사운드를 섞어 넣는다든지(천지창조, 사계 등 오라토리오) 하는 식입니다. 이 대목에서 제목 자체가 "농담(Joke)"인 현악 4중주 30번을 감상하고 넘어갑니다.

 

 

그러면 과연 하이든의 이같은 해학과 넉넉함의 원동력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그토록 냉대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말이죠. 아마 그의 어렸을 적 고난으로 심성 자체가 삭막하게 굳어졌다면, 비록 그가 장성해서 좋은 후원자를 만났다 해도 결코 이처럼 넉넉한 마음으로 남들을 대하고 음악을 해학적으로 만들어 대중과 웃음있는 소통을 할 수는 없지 않았을까요.

'하이든의 세계(Haydn's World)라는 전기를 저술한 '제임스 노턴'(James R. Norton)은 '하이든'이 매우 종교적인 사람이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하이든'은 어린 시절을 온통 교회 성가대원으로 지내면서 누구보다 깊은 신앙심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자신이 작곡한 거의 모든 악보에 빠짐없이 서두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In Nomine Domini)',  말미에는 'Laus Deo(하나님께 찬양을)'라는 문구를 적어 넣었다고 합니다. '하이든'은 자신의 일부 성가곡에까지 해학적 요소를 가미한데 대해 "하나님이 나에게 즐거운 마음을 주셨으니, 즐거움으로 섬기는 것을 용서해 주시리라"는 말도 남겼다고 합니다. '하이든'의 유별난  유머와 익살은 그의 부모에게 물려받은 천성과 이같은 종교적 영향 이외에는 딱히 설명할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하이든'악보 끝에 있는 서명 Laus Deo - '하나님께 찬양을')

7. '하이든'을 교향곡의 아버지로 이끌어 준  '포르포라', '모르친', '에스테르하지'가의 니콜라우스 1세

(Nicola Porpora)

'하이든'은 '성 스테판' 성당에서 쫓겨난 후 약 3년간 친지들 집 골방에서 신세를 지면서 음악 가정교사나 요즘 말하는 버스킹(길거리 연주)으로 생계를 잇는, 별로 미래가 보이지 않는 반 백수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1752년 '하이든'은 그의 생애 첫 음악 스승이자 은인이라 할 수 있는 '니콜라 포르포라(Nicola Porpora, 1686~1768)'를 만나는 행운을 얻습니다. '포르포라'는 이탈리아 출신 작곡가로 당시 최고 인기를 누리던 카스트라토, '파리넬리(Farinelli)'의 보컬 트레이너로 더 유명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하이든'을 보조 반주자로 채용해서 일거리를 주는 동시에 작곡에 관해 제대로 된 공부를 시킵니다. '하이든'은 나중에 "나는 그때서야 진정한 작곡의 기초를 공부할 수 있었다"고 술회할 정도였습니다.

(Count Morzin)

'하이든'이 처음 발표해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작품은 오페라였습니다. 백수생활 하면서 틈틈이 써두었던 작품을 1753년 비엔나에서 '절름발이 악마'(Der krumme teufel)란 제목으로 초연했는데 비교적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하이든'이란 이름을 대중들에게 처음 알리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점차 귀족들의 궁정에 프리랜서로 불려가는 일이 잦아졌고 결국 1757년경에는 '모르친 백작'(Count Morzin)의 궁정에 '카펠마이스터(음악장)'로 임명을 받습니다. '하이든' 생애 처음으로 정규직에 취업된 겁니다. 그의 나이 25살 때였습니다.

그가 정식 채용된 시점이 기록마다 조금씩 다르고 '모르친 백작'이란 사람도 오직 'Count Morzin'이라고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정확히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1757년에서 1759년 사이에 요즘의 체크 땅인 보헤미아 지역의 귀족 '페르디난드 막시밀리안 폰 모르친' (Ferdinand Maximilian von Morzin)에게 채용됐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아무튼 그는 처음으로 소규모지만 자신만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음악을 만들 수 있게 되었으니 드디어 작곡가로서의 날개를 단 셈이었습니다. '하이든'의 초창기 교향곡 10여곡은 바로 이곳에서 작곡되었습니다.

(Esterhazy가의 Nikolaus I)

그러나 '모르친' 백작가는 얼마 안있어 가세가 기울어 오케스트라를 유지할 수 없게 되는데 전화위복인지 '하이든'은 오히려 더 명망있고 부유한 귀족 가문인 '에스테르하지(Esterhazy)'가의 '폴 안톤(Paul Anton, 1711~1762)' 대공으로부터 초빙을 받게 됩니다. '폴 안톤' 대공은 '하이든'의 음악적 능력과 더불어 그의 깊은 신앙심을 높이 평가했다고 합니다. 1761년 부 음악장으로 부임해서 1766년에는 음악장으로 승진해 약 30년 가까이, 그러니까  그의 음악인생 대부분을  '에스테르하지'가에서 보내게 됩니다.

[지도: 비엔나 - 아이젠슈타트 - 페르토드, 중앙은 '하이든'을 초빙한 '에스테르하지'가의 폴 안톤(Paul Anton) 대공, 우측은 그의 동생이자 '하이든'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니콜라우스' 대공]

 '에스테르하지'가의 주인들은 대대로 '하이든'에 대해 매우 각별한 예우를 베푼 것으로 전해집니다.  '하이든'을 초빙한 '폴 안톤' 대공과의 당시 고용계약서를 보면, '하이든' 은 처음에 비록 부 음악장(Vice Kapellmeister)으로 부임했지만, 오직 성가곡 작곡시에만 음악장의 의견을 듣도록 했을 뿐, 그 외의 일에서는 음악의 작곡과 공연관리을 비롯해 오케스트라 단원, 가수 초빙 및 악기 관련 행정 등 모든 음악적 업무의 전권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마음껏 작곡활동을 펼칠 수 있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하이든'을 채용한 '폴 안톤' 대공은 이듬해 사망하지만 대공 자리를 이어받은 그의 동생 '니콜라우스 1세(Nikolaus I, 1714~1790)'는 형보다 더한 음악애호가로서 '하이든'의 중기 음악은 이 '니콜라우스 1세' 를 떼어 놓고서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는 당시 영국과 프랑스간의 미국 식민지내 주도권 다툼을 도화선으로 유럽 각국이 두패로 갈려 싸운 '7년전쟁(1756-63)'에 참전한 경험 때문인지 일상생활에서도 군대식 절도와 예법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집안 가솔들이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정직하고 절차에 맞도록 행동할 것을 늘 요구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아랫사람들을 얼마전 우리나라 장군이 당번병 대하 듯 막다룬게 아니라 각자 맡은 일을 잘 할 수 있게 금전적으로나 심적으로나 많은 배려를 해준 넉넉한 사람이었습니다.

'니콜라우스 1세'는 스스로 첼로와 비올라, '바리톤'(Baryton) 등 현악기를 직접 연주할 수 있을만큼 음악을 사랑했으며 특히 오페라를 좋아해서 '하이든'에게 오페라를 거의 매달 공연해 달라고 주문해 '하이든'의 오페라 작품은 대부분 이 시기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는 또 '하이든'의 교향곡 작품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주면서 충분한 리허설을 통해 작품을 실험하고 다듬을 수 있도록 시간을 주고 좋은 공연이 있을 때마다 두둑한 상금을 내리는 등 세심하게 배려했다고 합니다.

'바리톤'(Baryton)

특히 그는 '바리톤' 연주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하이든'에게 바리톤' 연주곡을 만들도록 특별 지시를 내립니다. '하이든'은 어쩐일인지 처음엔 이 일에 열심을 보이지 않았는데 '니콜라우스 1세'에게 한차례 따끔한 견책을 받은 후에야  부리나케 작곡을 시작한 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126곡의 '바리톤', 첼로, 비올라 또는 바이올린 3중주(Hob.XI (1-126) Trios for Baryton, Violin or Viola and Cello)입니다. 음원이 많지는 않지만 '하이든'의 숨겨진 명곡으로 평가됩니다.

'니콜라우스 1세'는 자켓 단추를 다이어몬드로 만들어 달고 다닐 정도로 사치를 좋아했는데 그의 이런 성격은 23~4명 규모의 당시로서는 작지 않은 오케스트라를 운영하는데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을 아끼지 않고 지출하게 했으며 결국 '하이든'의 작품활동에 큰 도움이 된 것으로 전해집니다.  '니콜라우스 1세'는 돈을 많이 쓰기도 했지만 재산관리와 재테크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조상에게 물려받은 것보다 훨씬 많은 부를 축척했다고 하니 '하이든'에게는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후원자였던 것 같습니다. 

[오스트리아 아이젠슈타트에 있는 에스테르하지 성, Schloss Esterhazy, 우측은 '하이든 음악당'(haydnsaal), 이곳은 오늘날 관광지가 되어 당시의 귀족들은 간 곳 없고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과 하이든의 음악만 남아 있습니다.]

 

'에스테르하지'가의 주거지는 원래 비엔나에서 남쪽으로 60Km 정도 떨어진 '아이젠슈타트'(Eisenstadt)의 '에스테르하지 성'(Schloss Esterhazy)이었습니다. 그러나 '니콜라우스 1세'는 많은 돈을 들여서, 지금은 헝가리 땅인 페르토드(Fertod)에 베르사유 궁전을 본딴 여름궁전을 짓습니다. 아이젠슈타트에서도 다시 수십키로미터를 남쪽으로 내려가야하는 먼 곳이었습니다.   '노이지들러(Neusiedler)' 호수의 아름다운 호반에 위치해서 음악적 흥취는 뛰어난 곳인지 몰라도 '하이든'을 비롯해 그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는 여름 내내 집에도 못가고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유배지나 다름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니콜라우스 1세'가 참석한 교향곡 연주회에서 4악장 말미에 연주자들을 하나씩 내보내 마지막엔 두사람만 남아서 곡을 마치게 하여 단원들의 휴가를 얻어낸 작품이 바로 '하이든' 교향곡 45번(Symphony No.45, F sharp minor, 고별교향곡)입니다.

[헝가리 페르토드(Fertod)에 있는 에스테르하지 가 여름궁전(Esterhaza)의 아름다운 전경]

 ​아무튼 어린 시절 고난 끝에 자리잡은 '에스테르하지' 궁정에서 '하이든'은 음악의 꽃을 활짝 펴고 자신만의 독특한 교향곡, 사중주, 3중주 등 각종 기악곡 체계를 수립하게 됩니다.  '교향곡의 아버지'가 될만한 기반을 어느정도 닦은 셈이긴 한데 아직은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고용계약에 따르면, '하이든'의 모든 작품은 그 소유권이 '에스테르하지'가에 속해 있어 궁정 외부에서 허락없이 연주회를 하거나  악보를 외부에 유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물안 개구리였던 셈입니다.

더구나 '하이든'은 매일 아침 대공이 어떤 작곡을 주문하는지, 어떤 행사에 어떤 곡을 연주해야 하는지 지시를 기다렸다가 즉각 수행해야만 하는, 그러니까 잠시도 외부에 나다니며 음악가들과 교류하고 연주회를 가질 기회가 전혀 불가능했다고 하니 이런 상황이 계속되었다면 아마도 오늘날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은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행히도 이러한 계약상 제한사항들은 1780년대에 들어서 많이 완화됩니다. 그때부터 '하이든'의 악보는 외국에 판매될 수 있었고 그의 명성도 외국으로 널리 퍼지게 됩니다. 그래서 프랑스 출판업자로부터 의뢰를 받아 작곡한 '파리 교향곡' 작곡하기도 하고 런던으로 가서 제2의 작품인생을 열기도 하면서 세계적인 작곡가로 성장합니다. (하편에 계속)

다음회에서는

에스테르하지 궁정 이후의 이야기와

하이든 음악과 관련된

재미있고 신기한 이야기들을

모두 엮어 봅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