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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에서 이어지는

'바흐' 마지막편입니다.

 

 

9. 바이마르 궁정으로 복귀하여 '콘체르트 마이스터'로 승진하다

1708년 뮐하우젠을 떠난 바흐는 5년만에 다시 바이마르로 갑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과거의 비정규직 악사가 아니라 바이마르의 통치자 '빌헬름 에른스트' 대공의 관현악단 오르가니스트로 정식 초청받은 것입니다. 바흐가 한 곳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고 본격적인 작곡활동을 벌이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때부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당시 '빌헬름 에른스트' 대공은 20~30명 규모의 오케스트라와 자신만의 오페라 하우스를 가지고 있는 음악 애호가였으며 독실한 루터파 기독교 신자로서 아마도 바흐의 음악 활동에 좋은 스폰서가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바흐는 이 곳에서 비발디, 코렐리 등이 출판한 악보를 통해 이탈리아 특유의 리듬과 하모니를 배우면서 클라비어 곡으로 개작도 하는 등 자신의 작곡 역량을 다듬게 됩니다. 또 그의 첫 크리스마스 칸타타 "그리스도인이여, 이날을 새기라"-Christen, ätzet diesen Tag(BWV 63) 등 많은 칸타타와 기악곡을 작곡해 공연했으며,  또 한참 후에 집대성하여 발표하게 되는 저 유명한 '평균율 클라비어 곡'들을 작곡하는 작업도 이 곳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Bach: Christmas cantatas (BWV40, 63, 110)

 

그동안 계속 하위직을 맴돌던 바흐는 1714년 드디어 '콘체르트 마이스터'(Konzertmeister)로 승진합니다. Konzertmeister란 원래 음악장(Conductor or Director of Music, 또는 Kapellmeister)보다 한계급 낮은 제2인자의 자리라고 합니다. 오케스트라의 제1 바이올린 파트를 리드하면서 초청 게스트가 없을 때 솔로 파트를 연주하는 그야말로 가장 실력이 뛰어난 연주자에게 주어지는 자리인데, 바흐는'콘체르트 마이스터'이면서도 당시 바이마르 궁정의 노쇠한 카펠 마이스터 '드레제'(Drese)를 대신해 실질적으로 오케스트라의 모든 업무를 관장합니다.  

바흐는 바이마르에서 이처럼 약 9년간을 평온하게 지내긴 하지만, 이 곳에서의 생활도 그다지 좋게 끝나지는 않습니다. 바흐는 언젠가는 '드레제' 카펠 마이스터의 후임으로  자신이 승진되리라 기대했던 모양입니다. 근데 1716년 막상 '드레제'(Drese)가 사망하자 '빌헬름 에른스트' 대공은 실력도 형편없는 '드레제'의 아들을 후임자로 임명합니다. 바흐는 크게 실망해서 작곡도 중단하고 대공에게 거의 욕설에 가까운 불평을 내뱉으며 항의를 합니다. 이때 '빌헬름 에른스트' 대공과 사이가 좋지 않은 한 측근 인사가 '쾨텐' (Köthen)시의 '레오폴드' 대공에게 바흐를 추천하여 '카펠 마이스터'로 초빙을 받게 됩니다.   

(아이제나흐, 뮐하우젠, 바이마르, 쾨텐)

 

'레오폴드' 대공의 초청을 당연히 수락한 바흐는 쾨텐으로 가기 위해 사직서를 제출합니다.  '빌헬름 에른스트' 대공은 그동안 자신에게 폭언을 쏟아 부으며 심기를 어지럽히던 바흐가 사전 협의도 없이 갑자기 떠나겠다고 선언하자 분노가 폭발해서 바흐를 무려 한달동안이나 궁정 감옥에 잡아 가둡니다. 그러나 바흐의 재능을 아깝게 생각한 것인지 결국 풀어주고 쾨텐으로 이직하는 것을 허락합니다. 감옥의 철창을 부여잡고 하다하다 이젠 옥살이까지 하는구나 하면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을 바흐가 참 안쓰럽긴 하지만,  학자들은 그 당시 궁정법도로는 바흐가 훨씬 더 엄한 처벌을 받을 수도 있었는데 그 정도로 끝난 것은 상당히 관대한 처분을 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이마르 시절의 바흐 초상화)

 

10. 행복했던 쾨텐시절 - 그러나 출장 중에 아내를 잃는 아픔과 재혼

우여곡절 끝에 1717년말 쾨텐시로 옮겨 간 바흐는 레오폴드 대공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다시 작곡활동에 전념합니다. 레오폴드 대공은 바흐의 역대 고용주 가운데 바흐의 능력을 가장 높이 샀던 사람입니다. 그가 바흐를 처음 만난 것은 아마도 1716년 1월 그의 누이동생 결혼식 때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누이의 신랑, 즉 매제가 바로 바이마르 '빌헬름 에른스트' 대공의 조카이자 과거 어린 바흐를 고용했던 '요한 에른스트' 공의 아들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Ernst August)였으므로 당연히 바흐가 결혼식 연주에 참여했을 것이고 그때 바흐를 처음 알게 됐을거란 추론입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레오폴드 대공에게 바흐를 추천했다는 '빌헬름 에른스트' 대공의 측근이 바로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였습니다.

레오폴드 대공은 칼빈파 기독교인이었는데 바흐의 작곡에는 오히려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레오폴드 대공이 교회 안에서는 음악을 허용치 않았기 때문에 바흐가 찬양곡을 작곡할 기회는 가질 수 없었으나 그 대신 세속적인 칸타타와 기악곡의 작곡에 많은 시간을 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여행을 좋아했던 레오폴드 대공은 바흐를 대동하고 인근 도시를 순회하면서 연주회를 열어 바흐의 대외적인 인지도 향상에도 도움을 줍니다. 또 레오폴드 대공은 바흐 아들 중 하나의 대부를 맡아 줄 정도로 인간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합니다.

바흐는 쾨텐에 약 6년을 머물면서 바이올린 소나타 등 수많은 기악곡을 발표했는데, 그의 유명한 '브란덴부르크 협주곡'도 여기서 만들어 낸 곡입니다. 또 그동안 준비해 왔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제1권을 완성시킨 것도 바로 이곳에서였습니다. 이 무렵 바흐는 그의 어렸을 적 친구, 뤼네부르크에 함께 추천받아 갔던 바로 그 친구, '게오르크 에어드만'(Georg Erdmann)에게 쓴 편지에서 쾨텐에서의 생활에 대한 만족감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가 음악을 사랑하는만큼이나 음악을 잘 알고 있는 은혜로운 주인을 모시고 있다네. 정말로 내 생애 끝날까지 그에게 봉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네."

(바흐가 '카펠 마이스터'로 일했던 쾨텐성, Köthen Castle, 현재는 박물관)

 

바흐는 레오폴드 대공을 따라 '칼스바트'(Karlsbad, 현재는 체크 지역)에 자주 가서 연주회를 가졌는데 두번째 출장 중이던 1720년 7월 갑자기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가 사망합니다. 정확한 사망원인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임신관련 감염 때문이 아니었나 추측됩니다. 바흐가 아내의 죽음을 알게 된 것은 두달 후 출장에서 돌아 온 다음입니다. 출장가기 전 멀쩡했던 35살의 젊은 부인이 이미 주검이 되어 묘지에 묻혀있는걸 바라보는 바흐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그러나 1년반 정도 지난 1721년 12월, 바흐는 16살 연하의 '안나 막달레나 빌케 (Anna Magdalena Wilcke)와 재혼합니다. '안나 막달레나'는 아버지가 트럼펫 주자인 음악가 집안에서 자라 쾨텐시 궁정의 소프라노 가수로 일했다고 하니까 바흐와는 평소에 상당히 친밀했던 사이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전편서 언급했듯이 그녀와의 사이에 13명을 자녀를 얻습니다.  아무튼 아내를 두번 얻는건 '텔레만'과 같은데 부부 금슬에 있어선 바흐가 훨씬 행복한 셈입니다. 어린 시절의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었는지도 모르죠.

바흐는 쾨텐에서 계속 지내기를 원했던 모양이지만 주변여건은 여의치 않게 돌아갑니다. 레오폴드 대공이 당시 프로이센 제국의 군비 부담금 지출을 늘리면서 음악예산을 삭감하고 오케스트라를 축소할 수 밖에 없게 되었고, 더구나 레오폴드 대공이 새로 부인을 맞았는데 그녀가 왠지 바흐 음악을 별로 좋아하지 않자 대공도 덩달아 음악에 관심을 덜 기울입니다. 바흐가 더이상 쾨텐에 머물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것인데, 마침 라이프치히에 자리가 생겨 옮기게 됩니다. 그러나 바흐는 레오폴드 대공과의 인연을 잊지 않고 계속 쾨텐에 곡을 만들어 제공해 주었고 레오폴드 대공이 1728년 사망했을 때는 진혼곡 칸타타를 작곡하여 장례식을 손수 지휘했다고 합니다.   



11. 천신만고 끝에 입성한 라이프치히 - 바로크 음악의 꽃을 피우다.

바흐가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Thomaskirche) 교회에 채용된 과정은 '게오르크 텔레만' 편에서 간단히 언급했었지만 실제로는 이 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고 합니다. '마틴 게크'(Martin Geck)가 저술한 "바흐의 삶과 작품"(Johann Sebastian Bach; Life and Works)에 그 채용과정이 아주 상세히 수록되어 있습니다.

 

(Martin Geck 저, 바흐전기)

 

'성 토마스' 교회의 터줏대감 '요한  쿠나우' (Johann Kuhnau)가 사망하자 교회는 후보군을 선정하기도 전에 무조건 제일 먼저 '텔레만'에게 초청장을 보냅니다. '텔레만'이 이를 사양한 후에야 교회는 7명의 후보자를 뽑아 우선순위를 정하고 오디션 일정을 짜는데, 1순위는'텔레만'처럼 성 토마스 교회와 라이프치히 대학을 다녔으며 당시 다름슈타트(Darmstadt)의 '카펠 마이스터' 였던 '크리스토프 그라우프너' (Chrostoph Graupner)로 그의 면접이 1723년 1월 17일, '메르세부르크' 궁정의 오르가니스트 '쇼트'(G. B. Schott) 면접이 2월 2일이었고 바흐 면접은 1주 뒤인 2월 9일이었다고 합니다. 

다행히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그라우프너'가 '다름슈타트' 궁정에서 사임을 허락하지 않아 후보군에서 탈락하게 됩니다. 교회 위원회는 면접을 거친 나머지 후보들을 대상으로 투표를 실시하여 바흐에게 최종 낙점합니다. 당시 교회측과 피고용자측이 첨예하게 다툰 문제는 교회부속 학교 학생들에 대한 지도 의무를 무보수로 부담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바흐는 무보수로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일을 맡겠다고 양보함으로써 다른 경쟁자들을 따돌린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습니다. 바흐가 라이프치히에서 맡은 임무는 토마스 교회와 니콜라스 교회 등 4개 교회를 위해 작곡, 공연하는 일 외에도 학교에서 라틴어를 가르치는 일, 성가대원에게 노래 지도하는 일 등이었다고 하니 아마도 과거의 어떤 직장보다 바빴을 것 같습니다. 

이처럼 간난신고를 겪고 1723년 라이프치히에 입성한 바흐는 죽을 때까지 이 곳에서 27년을 봉직하면서 수많은 주옥같은 명곡을 남깁니다.  미사곡, 수난곡, 오라토리오는 물론 5개의 칸타타 사이클 등 수많은 성가곡을 작곡했고, 첼로 모음곡, 건반 연습곡, 골드베르크 변주곡 등과 '평균율 크라비어 곡집 Book 2'를 완성합니다. 또 '텔레만'이 과거 운영했던 학생 중심의 앙상블 연주 동아리 '콜레기움 무지쿰' (Collegium Musicum)을 다시 활성화시켜 정기적으로 연주회를 열기도 합니다.

'콜레기움 무지쿰'의 공연은 주로 '짐머만 카페(Zimmermann Cafe)란 커피집에서 열렸는데, 이는 바흐가 커피를 무지 좋아하는 커피매니아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됩니다. 바흐는 거의 모는 장르의 음악을 작곡했지만 유일하게 오페라에는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흐를 깍아 내리려는 사람은 "봐라 바흐는 오페라를 한곡도 작곡하지 못했지 않느냐"고 하는데, 이에 반박하는 사람들은 "무슨 소리냐 바흐에게는 '커피 칸타타'가 있지 않느냐 이게 오페라와 다른게 뭐가 있느냐 바흐가 오페라를 작곡했다면 누구보다 좋은 작품을 만들었을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바흐가 1734년 작곡한 칸타타 '잠잠하라. 말하지 말라'(Schweigt stille, plaudert nicht, BWV211)는 '커피 칸타타(Coffee Cantata)'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곡입니다. 당시 유럽에는 커피가 여성의 몸에 해롭고 피부가 검어진다는 속설이 퍼져 있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딸에게 시집 가려면 커피를 마시지 말라고 금지령을 내리고 커피광인 딸은 커피를 못 마시면 차라리 죽겠다고 싸우다가 결국 아버지가 딸에게 항복하다는 코믹한 내용을 대화 형식의 칸타타 모음으로 작곡한 것이 바로 '커피 칸타타'입니다. 거의 오페라와 비슷한 곡이긴 합니다.

 

Bach, Coffee Cantata, BWV 211 - Harnoncourt

 

이밖에도 말년에는 캐논 변주곡(BWB869, 음악의 헌정(BWV1079) 등의 명곡을 발표했고  사망하기 며칠 전까지 '푸가의 기법'(Art of Fugue, BWV 1080)을 작곡하다가 미완성으로 남깁니다. 바흐의 작품들은 포르켈 등 음악사학자들이 정리한 목록들로 후세에 전해지고 있는데 그동안 악보가 유실된 것도 많고 다시 찾은 작품도 있는 것을 1950년 독일 음악학자 '볼프강 슈마이더' (Wolfgang Schmeider)가 재정리하여 작품번호를 매긴 것이 오늘날 사용되는 BWV 번호에 의한 바흐 작품 리스트입니다. BWV란 독일어로  Bach-Werke-Verzeichnis, 즉 '바흐작품목록'이란 뜻입니다. 1998년까지 몇차례의 개정판을 발표했는데 지금까지 BWV 번호는 1126번까지 매겨져 있습니다.

 

 

12. 라이프치히에 스러져간 불우했던 천재 음악가 - 작곡가의 태양으로 다시 떠오르다

바흐는 라이프치히에서 너무 일이 많은데다 급여도 넉넉한 편이 아니어서 쾨텐에서만큼 행복하고 만족스런 삶을 누리지는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교회 운영진과도 그다지 매끄러운 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교우관계도 넓은 편이 아니어서 절친이라고는 앞서 언급한 '에어드만' 정도인데, 1730년 그에게  보낸 편지글을 보면 라이프치히 생활에 대한 바흐의 심경을 조금 엿볼 수 있습니다.

(좌측: 1730년대의 라이프치히 전경, 우측: 바흐가 1730년 10월 28일 친구 에어드만에게 보낸 편지)

 

(편지 요약)
"자네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던게 벌써 4년전이네그려. 이 곳 라이프치히는 재미가 있어 보였고 우리 애들이 여기서 공부하고 싶어하기도 해서 오게 됐네만, 사실 생활비는 비싼데 월급은 많지 않고 부수입도 거의 생기는게 없어서 어려움이 크다네. 더구나 교회측은 음악에 별로 관심도 없는 것 같고 나를 따돌리기까지 하니 정말 하나님 도움이라도 받아서 새로운 자리로 옮길 수 있으면 좋겠네. 어떤 자리라도 괜찮을것 같네.

내 월급이 현재 700 라익슈탈러(Reichstaler, 요즘돈 약 5,000달러)인데 생활물가가 너무 비싸서 쓸 것이 없다네. 바이마르나 우리 고향 근처에 살면 400 라익슈탈러(약3,000달러)만 가져도 여기보다 훨씬 여유롭게 살텐데 말이야. 장례식이라도 한 건 있으면 한 100  라익슈탈러(약 800달러) 부수입이 생기지만 죽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고 말이지. 제발 자네 사는 곳 근처에 새로운 일자리 하나 있으면 추천해 주게나. 자네가 오라고 하면 무조건 달려 갈테니."

지금 돈 5천불이면 그리 적은 돈이 아닌데 아이들 10여명을 키우면서 살기엔 좀 부족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시골에 사는 고향 친구에게 약간의 엄살을 피운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친구가 새로운 일자리를 추천하지 않은 것인지 불러만 주면 무조건 달려가겠다는 바흐는 죽을 때까지 라이프치히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1750년 3월 바흐는 헨델의 눈도 멀게한 테일러 경에게 안과 수술을 받고 완전 실명할 뿐만 아니라 급격히 건강을 상하게 되었고 7월 28일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슈피타는 바흐의 사인이 뇌졸중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당시 신문들은 안과 수술의 후유증 때문에 바흐가 사망했다는 보도를 했었다고 합니다. 비발디, 텔레만 편에서 언급했듯이 바흐는 대중에게서 한동안 잊혀졌다가 1800년대 초반 화려하게 부활합니다. 작곡가의 태양으로 다시 떠올라 오늘날은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고 있습니다.

(성 토마스 교회에 있는 바흐 동상과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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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의 일생과 작품활동 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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