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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부활절에는 전세계 수많은 교회에서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Messiah)' 중 합창곡 '할렐루야'가 장엄하게 울려 퍼지고 사람들은 자리에서 기립합니다. 이처럼 수백년의 시공을 넘어 세계 방방곡곡에서 끊임없이 공연되고 있는 불후의 명작을 남긴 바로크 작곡가 '조지 프레드릭 헨델'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앞서 살펴 본 3인의 바로크 음악가들과 비교해서 그는 무슨 특색을 가지고 있는지. 바흐만큼이나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을까, 비발디처럼 오페라 작곡에 미쳤던 사람일까, 아니면 텔레만처럼 독일 음악계를 휘어 잡았던 사람일까. 헨델에 관한 의문점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과정을 통해 그의 캐릭터를 3D 프린팅 하듯 입체적으로 조명해 본다.

 

(조지 프레드릭 헨델, 1685~1759)

 

1. 헨델은 어느나라 작곡가?

우선, 독일에서 출생한 헨델이 그 옛날 굳이 영국에 가서 음악을 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헨델의 고향인 독일 할레, 그리고 그가 주로 활동했던 영국 런던에서는 매년 헨델을 기념하는 음악 페스티발이 열린다. 아직도 영국과 독일 사람들은 헨델이 어느 나라 음악가냐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는 일이 많다고 한다. 심지어 엘리자벳 여왕은 언젠가 할레의 '헨델 페스티발'에 보낸 축하 서한에서 "헨델이 대부분의 삶을 영국에서 지냈고 걸작품도 대부분 영국에서 작곡했음"을 새삼 강조했다는 소문이 있다. 영국 작곡가를 가지고 독일인들이 너무 설치는거 아니냐는 은근한 비아냥이었을까.

그렇다면 헨델은 과연 어느 나라 작곡가로 분류하는게 맞을까. 그는 1685년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1710년 영국으로 건너가 1727년 영국 국적을 취득한 후 1759년 타계할 때까지 삶 전체의 3분의 2를 영국에서 살았으니 영국인이라는 주장에 틀림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유대인은 어느 나라에 살든 유대인이라고 부르듯이 현실적으로는 헨델을 독일 작곡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것도 사실이다. 어떻든간에 별 상관 없는 일이지만 그의 국적에 따라서 부르는 이름이 조금 달라지는게 문제다. 자료마다 독일 이름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과 영국식 이름 '조지 프레드릭 헨델'(George Frideric Handel)이 구분없이 혼용되는 상황이다. 이글에선 영국식 이름으로 통일하도록 한다.

헨델은 왜 영국으로 왔느냐는 주변의 질문에 대해 "내 성씨 Händel에서 점 두개를 빼버리고 싶어서 왔지요"라고 농담처럼 대답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영국 활동을 시작하면서 독일 이름 Händel에서 움라우트를 뺀 Handel로 표기하되 발음은 그냥 '헨델'로 해 달라고 했다니 독일어 성씨의 철자를 Hendel로 완전히 바꾸고 싶진 않았던 모양이다. 여러 기록을 보면, 그가 영국으로 건너가 활동을 시작한 계기는 어느정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비발디나 텔레만처럼 다른 나라에 가서 잠시 활동을 하다 귀국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귀화를 해버린 건 무슨 이유인지 웬만한 자료에서는 명쾌한 설명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데, 이를 심도있게 파헤쳐 보기로 한다.

2. 헨델이 영국으로 간 까닭은 - 그는 배짱 좋은 음악가였나 아니면 독일 밀정이었나?

먼저 헨델이 영국으로 가게 된 전후 상황과 배경을 살펴본다.  헨델은 영국에 가기 직전 이탈리아에 3년간 머물면서  2개의 오페라, '로드리고'(Rodrigo, 1707, 피렌체)와 '아그리피나'(Agrippina, 1709, 베네치아)를 연속 성공시킴으로써 어느정도 국제적인 지명도를 얻게 된다. 더구나 그 당시 영국은 대작곡가 '헨리 퍼셀'(Heny Purcell, 1659~1695)이 사망한지 15년정도 지난 시점으로 그를 대체할만한 유명 작곡가가 아직 등장하지 않은 가운데, 영국 음악계는 공연되는 오페라마다 흥행에 참패하면서  아주 깊은 침체와 좌절의 수렁에 빠져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헨델이 영국에 건너가 오페라 흥행에 다시 불을 붙인 것은 아주 절묘한 타이밍이긴 했다.

(Newman Flower가 1948년 저술한 헨델 전기 표지, 우측은 첫 런던 방문 당시 25세의 헨델 초상, )

 하지만,  1710년 6월 이탈리아에서 귀국하자마자 하노버의 선제후(Elector)인 '게오르크 루드비히'(Georg Ludwig) 대공의 궁정악장 (Kapellmaeister)으로 고용된 헨델이 그해 12월, 불과 반년이 지나지 않아서 런던에 가게 된 것은 어떻게 된 일일까. 약관 25살의 나이에 이런 중책을 맡자마자 '루드비히' 대공의 눈치도 안보고 해외로 장기 출타를 요청할만큼 배짱이 두둑했던 것일까. 아니면, 동갑인 바흐가 1717년에야 간신히 쾨텐 궁정의 악장이 된 것과 비교할 때 보통 빠른 출세가 아니었는데 헨델이 이 막중한 자리를 내팽개칠만큼 런던 활동이 그리도 매력적이었던 것일까.

헨델은 영국에 온지 몇달 안된 1711년 2월 런던에서 오페라 '리날도(Rinaldo)로 대성공을 거둔 후 그해 6월 귀국했다가 1712년 10월 다시 런던으로 돌아온 후엔 몇차례의 독일 나들이를 빼곤 평생 영국에서 살다가 뼈를 묻는다. '루드비히' 대공은 헨델의 귀국을 여러번 종용했음에도 말을 듣지 않아 무지 불쾌히 여겼으며 결국 그가 부재 중인 1713년 5월 궁정악장 자리에서 해임하기에 이른다. 정식 사임절차도 없이 '루드비히' 대공을 배신한 셈인데 재미있는 것은 1714년 9월 '루드비히' 대공이 영국의 왕(조지 1세)으로 등극하여 런던에서 헨델을 마주치게 됐다는 점이다. 헨델은  심한 질책이나 처벌을 받지는 않았을까. 이에 대해 어떤 기록은  헨델이 조지 1세에게 아름다운 선상 연회용 수상음악(Water Music)을 헌정해서 왕의 진노를 피할 수 있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실제로 무슨 처벌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럴 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1714~15년에는 수상음악을 작곡한 기록이 없고 가장 빠른 것이 1717년인 점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그러다 보니 또 어떤 기록에서는  '루드비히' 대공이 헨델에게 영국 왕실의 왕위계승에 관한 첩보를 염탐하도록 비밀 임무를 주어 일부러 런던에 보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역시 특별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영국의 왕위계승 서열 2위였던 '루드비히' 대공이 영국 왕실과 정계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것은 확실하므로 런던에서 좋아할만한 헨델이라는 작곡가를 밀정으로 보내 영국내 돌아가는 상황을 수시 보고하도록 지시했을거란 추측도 꽤 설득력은 있어 보인다. 헨델의 수상음악이 아무리 훌륭했다고 해도 주인의 귀국 명령을 무시한 데 대해 아무런 처벌도 없었다는 점은 이런 주장의 신빙성을 더해 준다.(독일 대공이 영국 왕으로 등극한 사연은 맨 아래 별도기사 참조)

3. 헨델은 왜 귀화했을까?

헨델이 어떤 이유와 계기로 영국에 왔는지보다도 더 의문스러운 것은 그가 왜 영국에 귀화해서 붙박이로 살게 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요즘 같은 국제화 시대에도 남의 나라에 이민가서 사는 일이 쉽지는 않은데 말이다. 우선 헨델은 낯선 런던에 온 이후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지부터 살펴보자.  '뉴먼 플라워'의 헨델 전기에 따르면, 헨델이 처음 런던에 도착했을 당시 주변 여건은 여러모로 최악이었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영국 음악계 자체가 침체해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헨델이 비록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다소 명성을 얻긴 했으나 영국 음악계에서의 인지도나 영향력이 그리 높은 것도 아니었고 특히 영어를 거의 하지 못한 것도 큰 장애요인의 하나였다. 헨델은 나중에 영어 공부를 따로 해서 능숙해지긴 했으나 독일어 억양과 발음은 끝까지 버리지 못했다고 한다.

이런 저런 어려움 속에서 헨델이 런던에서 단 시간내에 첫 오페라를 무대에 올리고 성공을 거두는 일은 요원해 보였다. 그러나 성공하는 사람에겐 귀인이 찾아온다 했던가. 그는 우연찮게 런던 오페라 부흥을 모색 중인 열정적이고 흥행의 촉을 가진 유능한 공연 기획자 '아론 힐(Aron Hill)을 만나게 된다. '힐'은 런던의 공연거리 '헤이마켓'(Haymarket)에 있는 '여왕 극장(Queen's Theatre, 오늘날은 Her Majesty's Theatre, 여왕폐하 극장)'의 운영 책임자로서 이탈리아에서 헨델이 얼마나 성공적인 활동을 벌였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힐'은 헨델을 대환영하면서, 만나자마자 이탈리아 작가의 오페라 대본을 주고 작곡을 의뢰한다. 헨델은 2주일만에 작곡을 완성했고 1711년 2월 런던 첫 무대의 막을 올렸는데 이 오페라가 바로 '리날도 (Rinaldo)'다. 이 오페라에 나오는 아리아 '울게 하소서' (Lascia ch'io Pianga)는 오늘날도 대중적 사랑을 받고 있다.

(헨델의 Rinaldo 중 가장 유명한 Aria - Lascia ch'io Pianga)

 

 

십자군 전쟁을 배경으로 한 '리날도'는 이탈리아에서 초빙된 베이스 가수와 런던에 온 지 얼마 안되는 소프라노 카스트라토(Castrato는 바흐편 참조)의 새로운 목소리에 헨델의 아름다운 선율이 함께 어우러져 런던 관객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리게 된다. 그동안 한산했던 '헤이마켓' 거리가 마차 행렬로 가득 찼고 2월부터 6월까지 15회 공연하는 동안 전 좌석 매진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헨델의 명성이 런던 음악계를 진동시켰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그해 6월 오페라 시즌이 끝나자마자 '루드비히' 대공의 눈치를 보느라, 아니면 부여받은 밀정임무의 중간보고를 하느라 할 수 없이 독일로 귀국한 헨델의 귓가에는 아마도 런던에서 받았던 팬들의 박수 소리가 계속 맴돌았지 않았을까.

4. 헨델의 오페라 사랑과 고난

더구나 하노버는 오페라 공연이 전무한 동네였다고 '뉴먼 플라워'는 기록하고 있다. 그는 헨델이 다시 런던으로 가게 해 달라고 '루드비히' 대공에게 청원한 것은 바로 자신의 오페라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독일에 있는 동안에도 런던 음악계 인사들과 지속적인 교신을 가지면서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는 등 영국 재 진출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오페라 곡을 90여곡 작곡했던 비발디 만큼이나 헨델도 오페라에 미쳐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대목에서 헨델의 오페라 역정에 관해 잠시 정리를 하고 넘어가자.

헨델은 평생 46곡의 오페라(자료마다 통계가 42~49곡으로 제각각임)를 작곡했으니 비발디 못지 않게 많은 작품을 남긴 셈이다. 물론 비발디의 오페라 작품 수가 훨씬 많긴 하지만 악보가  대부분 유실된데다 남아 있는 작품도 현대에 리바이벌 되는 경우가 많지 않은 반면, 헨델의 경우는 대부분의 악보가 오늘날까지 온전히 전해지고 있을 뿐 아니라 아직도 현대인이 선정한 세계 100대 오페라에 4곡이나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이집트의 줄리오 체사레'(Giulio Cesare in Egitto, 51위, 1724), '알치나'(Alcina, 64위, 1735), '올란도'(Orlando,80위, 1733), '세르세'(Serse, 88위, 1738)가 그것으로, 모두 런던에서 초연된 작품들이다.

 

헨델의 오페라를 시기별로 나눠 보면, 독일에서 4편, 이탈리아에서 2편을 작곡했고 나머지는 모두 영국에 건너 온 이후 1711년부터 1741년까지 30년간 작곡하고 공연한 작품들이다.  그가 이 기간 중 오페라만 작곡한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 영국에서 그가 지낸 시간을 약 45년이라고 할 때 이처럼 전반기 30년, 그러니까 영국 체류기간 전체의 3분의 2 정도를 오페라 제작에 심취해 있었던 셈이다.  그는 오페라 공연을 위해 '왕립 음악 아카데미'(Royal Academy of Music) 등 오페라 극단을 창립하여 수많은 작품을 흥행시키기도 했지만  그 이면에서는 온갖 간난신고를 겪게 된다.

얼마전 우리나라 유명 여배우가 감독을 폭행하는 사건이 보도된 적이 있는데 그 당시에도 유명 오페라 가수들의 갑질과 횡포가 꽤 심했던 모양이다. 가수가 어떤 곡은 부르지 않겠다고 작곡가의 지시를 거부하는가 하면 공연 도중 가수들끼리 주먹다툼을 벌이고 팬들까지 동원해 싸움질을 하는 바람에 공연정지를 당하기도 한다. 또 당시 정계는 왕당파와 왕세자파로 나뉘어져 서로 견제하는 상황이었는데 헨델의 오페라 극단을 후원해 주는 왕당파에 대한 공격의 일환으로 왕세자파가 '귀족 오페라 극단'(Opera of the Nobility)을 설립해 유명 가수를 고액으로 스카웃 하는 등 무자비한 금전 공세를 펴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치명적이었던 것은 1728년 '존 게이'(John Gay)라는 극작가가 발표한 영어 오페라 '거지의 오페라'(Beggar's Opera)였다. 헨델 오페라 공연 중 오페라 가수가 서로 싸운 이야기를 소재로 이탈리아 오페라를 조롱하고 빈정대는 내용으로 당시 62회 공연이란 엄청난 기록을 세우고 오늘날까지도 공연될 정도로 영국인에게 대단한 인기를 얻었던 작품인데, 결과적으로는 헨델의 이탈리아 오페라 흥행에 완전 찬물을 끼얹었다.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탈리아 오페라에 갈채를 보내는 것은 상류사회의 '스노비즘(속물주의)'에 불과하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된다. 헨델은 이처럼 어려움에 부딪힐 때마다 잠시 극단 문을 닫았다가 얼마 후 새로운 극단을 다시 조직하는 등 오페라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5. 헨델의 오라토리오 - 신앙심이냐 비즈니스냐

헨델의 이러한 오페라 사랑은 그가 젊은 시절을 영국에서 보낼 수 밖에 없었던 중요한 이유의 하나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헨델은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한 영국인의 관심이 사그라 들고 재정상태도 최악을 맞으면서 1741년 이후에는 결국 '데이더마이어'(Deidamia)라는 작품을 마지막으로 오페라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그 대신 '메시아' 같은 오라토리오 작곡에 전념하게 된다. 그의 오라토리오 29편 중 20편 정도가 174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헨델이 이처럼 음악인생 후반기에 성가곡 오라토리오를 많이 작곡하게 된 것은 기독교에 대한 신앙심이 깊어졌기 때문일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는 개신교도(루터교)이긴 했지만 바흐처럼 성경을 밑줄 그어가면서 읽고 그 감동을 한켠에 노트로 남길만큼 독실한 신앙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앙심 때문이라기 보다는 재정상태가 악화되자 그 돌파구의 하나로 오라토리오를 공연하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오라토리오는 대본이 영어로 되어 있어서 영국인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으면서도 오페라 제작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의상비, 무대장치비, 유명 가수 스카웃 비 등을 지출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헨델의 종교에 대한 태도를 좀 더 부연 설명하면, 그는 서로 다른 교파에 대해 매우 관대해서 영국 성공회냐, 카톨릭 교회냐, 루터교나 칼빈교 등 개신교회냐를 가리지 않고 성가곡을 써주고 작품활동을 함께하는 자유로운 행보를 보였다고 한다. 헨델은 이런 행동이 가능한 영국 음악계의 풍토를 선호하지 않았나 싶다.  독일의 바로크 작곡가들은 대부분 어느 한 교회나 궁정에 소속되어 고용자인 성직자나 왕족의 교파 또는 취향에 따라 작곡의 방향이 결정되는 한계를 겪을 수 밖에 없었지만, 영국에서의 헨델은 자영업자처럼 공연을 통한 수익창출과 귀족들의 선의적 후원을 받아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게 음악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의 공연 기획사 같은 비즈니스를 운영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6. 찬밥 대접 받았던 메시아(Messiah) - 헨델의 위기와 재기

헨델이 오페라를 그만 둔 후 발표한 첫 오라토리오인 '메시아'는 어떤 작품인지 좀더 살펴보자. '메시아'는 모두 3부로 구성된 방대한 영어 오라토리오다. 제1부 '예수 탄생' - 21곡, 제2부 '예수 수난' - 23곡, 제3부 '부활' - 9곡 등 총 53곡의 아리아, 합창, 듀엣으로 이뤄져 있으며, 요즘도 부활절에 주로 교회에서 연주되는 '할렐루야'는 바로 제2부 마지막 곡으로 편성되어 있는 합창이다.  '할렐루야' 합창이 시작되면 모든 청중이 기립하는 전통이 있는데 그 역사적인 연원에 관해서는 확실한 자료가 없는 추측들 뿐이다. 당시의 영국 왕 '조지 2세'가 이 '할렐루야'가 시작되자 자리에서 일어섰기 때문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Hallelujah Chorus')

이 방대한 작품을 헨델은 불과 24일만에 작곡한 것으로 유명하다. 헨델의 절친이자 동업자인 '찰스 제넌스'(Charles Jennens)가 1741년 7월 10일 대본을 넘겨줬고 8월 22일 작곡에 착수해서 9월 12일, 작곡을 완료한다.  헨델 전기 작가들은 이만한 규모의 대작을 이처럼 짧은 시간에 작곡한 것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위업이라고 입을 모은다.  아마도 천재 작곡가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7월부터 한달여간 머리 속에서 구상을 다 끝내고 나머지 시간엔 그저 악보에 음표를 정리해서 옮겨 적은 것일게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메시아'가 작곡된 후 바로 공연되지 않고 해를 넘긴 1742년 4월 처음 공연됐으며 초연 장소도 런던이 아닌 아일랜드 '더블린'의 대음악당이었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런던의 교회 지도자들과 시민들은 어느덧 '헨델'하면 세속적 오페라, 배우들의 난투극, '거지의 오페라'를 연상하면서 교회음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란 생각을 하게 된 모양이다.  헨델이 '메시아'를 작곡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뭔가 신성모독적인 내용이 포함된건 아닌가 의심했으며 교회들은 자기 교회에 고용된 가수들이 헨델의 오라토리오에서 노래부르는 것을 금하기까지 했다. 또한 런던 교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음악이 일반 극장 무대에서 공연되는 자체를 혐오했다고 한다. 그래서 헨델이 고육지책으로 선택한 카드가 과거 한차례 공연한 적이 있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발표하자는 것이었는데, 그나마도 자선활동을 통해 교류가 있었던 더블린의 친구와 단체들이 그를 초청해 주지 않았다면  '메시아'는 영영 책상 서랍에서 나오지 못했을 것이고, 헨델은 아마도 영국생활을 포기하고 독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뉴먼 플라워'는 기술하고 있다.

더블린에서의 메시아 공연도 아일랜드의 성직자이자 정치인이면서 '걸리버 여행기' 작가로 유명한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 1667~1745)로부터 '성 패트릭 대성당'의 가수는 일체 캐스팅을 금지한다는 엄포를 감수하는 등 크고 작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다행히 더블린 초연은 대성공을 거둔다. 더블린 대음악당의 700석 좌석이 꽉 차고 거리에는 입장하지 못한 군중들이 서성이는 가운데 첫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다음날 아일랜드 신문, '포크너스 저널'(Faulkner's Journal)은 "감동에 싸인 수많은 관객들에게 전달된 아름답고 정교하고 강렬한 환희는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라고 극찬을 한다. 첫 공연에서 거둔 수익은 모두 현지의 자선단체에 기부했다고 한다.

헨델은 6월에 '메시아' 제2차 공연을 가진 후 런던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런던의 민심은 아직도 싸늘했다. 그는 자신의 귀환을 언론에 전혀 알리지 않고 조용히 귀환했다. 아무런 공연행사도 없이 묵묵히 때를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자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 런던 시민의 마음도 돌아서기 시작한다. 이미 더블린에서의 성공적인 '메시아' 공연에 관해 소문을 듣고 있던 그들도 헨델의 작품에 다시 흥미를 가지게 된 것이다. 헨델은 그들이 외면했던 '메시아'는 그냥 묻어둔 채 새로운 오라토리오 '삼손'(Samson)을 작곡해 선보이게 된다. 성경의 삼손 이야기를 극화한 3막짜리 오라토리오 '삼손'은 헨델이 마지막으로 설립한 극단 '코벤트 가든(Covent Garden)'에서 1743년 2월 초연되었고 다시 런던 음악애호가들을 사로잡았다. 모두 8회에 걸쳐 공연되면서 대중적 인기는 물론 재정적으로도 회복기를 맞게 된다.

헨델은 분위기가 어느정도 무르익자 '메시아'의 런던 공연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여전히 헨델의 성가 음악에 반목적인 교회 지도자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제목을 '신성한 오라토리오'(A Sacred Oratorio)라고 바꾸고 1743년 3월 무대에 올린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런던 시민들의 반응은 그다지 뜨겁지 않았다. 그래서 그해 6회 공연 예정이었던 것을 3회로 줄이고 1744년부터는 가사, 악기편성, 가수 등을 조금씩 수정해 가면서 간간이 공연을 이어가다가 1749년이 되어서야 원래 제목인 '메시아'로 공연하게 된다. 특히  런던의 어린이 보육 시설인 '파운들링 호스피탈'(Foundling Hospital)에서의 성공적인 공연을 계기로 '메시아'에 대한 대중의 편견은 완전히 해소된다. 1759년 4월 6일자 마지막 공연이 있은지 8일 후 헨델은 조용히 숨을 거두면서 유언을 통해 '메시아' 악보의 저작권을 이 보육원에 남긴다. 명곡은 작곡가의 사후에 더 유명해지는걸까. 그가 죽은 후 '메시아'는 영국 전역은 물론, 유럽 다른 나라로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한다. 헨델이 지금 깨어난다면 그토록 찬밥이었던 '메시아'가 어떻게 이처럼 세계 방방곡곡에서 연주되고 있는지 어리둥절해 할지도 모르겠다.

7. 헨델의 재운과 재테크 - 노블리스 오블리제

지금까지 살펴 본 바로는 헨델이 재정적으로 무지 쪼들리면서 살았던게 아닌가 느껴질 수 있는데 헨델의 삶 전체를 놓고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는 재테크에 밝고 재물운도 매우 좋은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불우 이웃에게 베풀기를 좋아하는 넉넉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앞서 어려운 가운데서도 더블린에서의 '메시아' 첫 공연 수익금을 모두 자선기관에 희사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다만, 개인적으로 축재를 위한 돈벌이가 아니라 버는 돈을 아낌없이 오페라 제작에 쏟아 붓다 보니 오페라 흥행에 실패했을 때 일시적으로 휘청거린건 사실인 것 같다. 헨델의 재물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모아본다.

아직 '앤' 여왕 시절인 1713년 1월 헨델은 칸타타, '앤 여왕 생일을 위한 송가' (Ode for the Birthday of Queen Anne, 첫 소절 가사인 'Eternal source of light divine'을 곡 이름으로 부르기도 함)를 '앤' 여왕의 생일에 공연하려고 작곡했는데, '앤' 여왕은 당시 국사로 바쁘기도 했지만 원래 음악에 별 관심이 없어서 당시 여왕 앞에서의 공연은 무산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앤' 여왕은 무슨 생각에선지 이 작품에 대한 포상으로 헨델에게 연간 200 파운드의 종신연금을 하사했다고 한다. 그 당시 파운드의 가치는 지금의 약 140배라고 하니 200 파운드라면 오늘날 가치로 약 4,100만원에 해당하는 큰 돈이었다. 아무런 조건이 붙지 않는 이런 거액 연금을 평생 선물로 줄 만큼 헨델에 대한 영국 왕실의 예우가 대단했다는 뜻이니 당시 젊은 헨델로서는 감격할 일이 아니었을까.

 

('앤' 여왕 생일을 위한 송가, Eternal source of light divine)

헨델은 이 연금과 공연 수익금 일부를 주식에 투자해서 꽤 수익을 거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스페인의 노예무역을 주 업무로 했던 '남해회사'(The South Sea Company)와 '왕립 아프리카 회사'(Royal African Company, RAC)의 주식에 투자한 사실이 근대에 밝혀지면서 헨델의 도덕성에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기도 했다. 지난 2013년 RAC 주주명부(1720년 시점)가 발견되었고 거기서 스펠링이 조금 틀리긴 하지만 'Mr. Frederick George Handle'라는 이름의 구좌가 확인된 것이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이 회사들은 당시 영국 정부가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으로 적자가 된 국고를 보전하기 위해 설립했고 영국 왕과 많은 귀족들이 주주로 참여한 것을 보면 국가정책에 호응하는 차원에서 투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나 싶다. 또 이 회사는 노예무역의 수익성이 좋지 않아 나중엔 금융회사로 전환한다.

또 이 회사에 대한 투자로 이익을 본 사람도 있지만 막대한 손실을 겪은 이들도 많다. 이 주식은 한때 영국 정부의 정책적 호재가 터지면서 겉잡을 수 없는 상한가를 거듭했다가 거품이 걷히면서 아래 그림과 같은 대폭락을 기록하기도 했다.

(South Sea Company의 주가 그래프)

위 그래프를 보면, 1719년 초부터 수직 상승하기 시작해서 늦여름 쯤 최고점을 찍은 후  1720년초에는 완전 원래 가격으로 떨어진 상황이다. 헨델은 1716년 이 주식을 매수했고 1720년 이전에 큰 수익도 큰 손실도 없이 빠져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안전 자산인 이 회사 채권에 투자하여 안정적인 수익을 도모한 것으로 전해진다.  반면에 위 그래프에 표시된 것처럼 과학자 '아이작 뉴턴' 경(1643~1727)은 1719년초 상승세를 계속 따라가면서 거액을 투자했다가 하반기부터 시작된 폭락 장세의 마지막에 간신히 털고 나옴으로써 요즘 말하는 쪽박을 찬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이 주식투자에서 기록한 총 손실은 오늘날 금액으로 280만 파운드(약 41억원)에 달한다고 하니, 만유인력을 발견한 천재 과학자도 돈 욕심 다스리는 법에서는 헨델에게 한 수 뒤진 것 같다.

영국의 '더 텔레그라프'(The Telegraph)지가 2016년 5월 23일자 기사에서 분석한 바에 따르면, 헨델은 채권 투자를 통해 연간 500 파운드의 수익을 꾸준히 벌어들였으며 죽었을 때 남긴 유산이 14,000 파운드, 오늘날 가치로 200만 파운드(약 30억원)에 달했으며, 금융자산 외에도 그림 수집 취미가 있어 렘브란트 등 많은 명화들을 소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도 많은 자선활동을 했지만 죽으면서도 상당부분의  재산을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그가 평생 보여준 자선활동을 보면 속으로는 어느 누구보다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본인이 귀족은 아니었지만 거의 귀족처럼 대우받고 귀족들과 어울려 살았던만큼 귀족에 준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려는 마음이었을까.

지금까지 여러가지 분석을 통해, 헨델이 영국에서 활동하게 된 이유를 몇 가지로 정리해 본다면, 1. 헨델의 오페라에 대한 열정과 영국인의 열광, 2. 교회나 궁정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음악활동 시스템, 3. 영국 왕실의 연금 선물과 같은 극진한 예우 등을 꼽을 수 있겠다. 그래도 뭔가 좀 부족한 느낌인데 다음 편에서 헨델의 성장 환경과 성격, 교우관계, 영국귀화의 결정적인 이유 등을 살펴 보면서 헨델의 3D 이미지를 완성시켜 봅니다.(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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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독일 대공이 어떻게 영국 왕이 될 수 있었나?

헨델을 좀더 이해하기 위해 그 당시의 시대상황을 요악해 본다.

먼저 독일의 상황을 보면, 로마제국 쇠퇴 이후 유럽 중심부를 지배하던 프랑크 왕국이 800년대 들어 프랑스와 독일로 쪼개지면서 독일 왕국의 오토 1세(912~973)는 지금의 독일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벨기에, 북쪽으로 네덜란드, 동쪽으로 체크, 남쪽으로 이탈리아 북부를 아우르는 넓은 지역을 통치하게 된다. 로마 제국은 쇠망했지만 그 브랜드 네임은 여전히 막강했다. 오토 1세는 로마교황에게 제관을 수여받고 나라 이름을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이라고 바꾼다. 이 신성로마제국은 962년부터 1806년까지 존속하는데 나중엔 여러 개의 공국으로 분권되면서 황제는 주요 공국의 대공들이 투표로 선출하는 방식이 된다. '게오르크 루드비히' 대공은 바로 하노버 지역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Braunschweig-Lüneburg) 공국의 대공이었으며 황제 선출권을 가진 선제후(Elector)였다.

다음 영국의 상황을 보면, 원래 영국 땅에 거주했던 켈트 족은 7세기부터 북쪽으로 밀려나고 그 대신 독일 북부와 스칸디나비아 지역에 살던 게르만 족의 일원인 앵글로 색슨 족이 지배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사실 영국과 독일의 지배계층은 혈통적으로 어느정도 맞닿아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루드비히' 대공이 조지 1세로 등극하기 직전의 영국왕은 '앤' 여왕이었는데 그녀와 '루드비히' 대공은 이종 6촌 남매 사이였다. 좀더 설명하면, '앤' 여왕은 제임스 1세(1566~1625)의 친증손녀였고 '루드비히' 대공의 어머니 '소피아' 공주는 제임스 1세의 외손녀로서 독일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Braunschweig-Lüneburg) 공국의 대공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Ernst August)에게 시집와서 '게오르크 루드비히'를 낳은 것이다.

그러나 영국 본토에도 많은 왕위 계승자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다지 가까운 인척도 아닌데다 절반은 외국인이나 다름없는 '루드비히' 대공에게 왕위가 돌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계 최악의 종교전쟁이었던 '30년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카톨릭에서 개신교가 분파되면서 유럽은 나라별로 또는 지역별로 카톨릭파와 개신교파가 대립하는 상황이 되었다. 전쟁의 발단은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시작되었다. 카톨릭이 우세한 독일 남부지역에서 개신교를 탄압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개신교를 믿는 북부지역의 공국들이 반발하면서 시작된 전쟁은 이웃의 프랑스, 스페인, 덴마크, 스웨덴, 영국 등 거의 모든 유럽 나라들이 가세하여 1618년부터 1648년까지 30년이나 지속된다. 이 전쟁은 무려 800만명의 사망자를 낸 끝에 "모든 개인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라는 국제협약(베스트팔렌 조약)을 맺는 것으로 간신히 마무리 된다.

이 전쟁에서 개신교 편에 섰던 영국은 개인의 종교자유와는 별도로 1701년 "영국 왕은 반드시 개신교도여야 한다"는 새로운 왕위계승법을 제정한다.  이 법으로 인해 카톨릭 신자인 영국 왕실의 수많은 왕위 계승 후보들이 탈락하게 되었고 독일에 시집와 있던 '소피아' 공주에게 왕위계승 1순위가 주어진 것인데, 그녀는 이미 80세가 넘은 고령으로 '앤' 여왕과 1714년 같은 해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망해 버림으로써 왕위 계승 2순위였던 '루드비히' 대공에게 왕위가 돌아가게 된 것이다.

당시 '앤' 여왕은 17명의 아이를 임신했으나 모두 사산하거나 어려서 죽어 가까운 후계자가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지독한 비만으로 다리를 절만큼 건강이 안좋았다고 한다. 따라서 '루드비히' 대공으로서는 '앤' 여왕의 거취와 영국 정치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예의 주시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헨델의 밀정설이 나오는 이유다. 아무튼 조지 1세로 등극한 '루드비히' 대공은 영어를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치와 국정 운영은 모두 내각과 의회에 일임했다고 한다. 그래서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전통이 바로 조지 1세 때 부터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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