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반응형

상편에서 이어집니다.

 

 

5. 음악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나 나이 10살에 어머니 아버지를 잃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1685년 3월 21일 독일의 아이제나흐시에서 시음악장인 '요한 암브로시우스 바흐 (Johann Ambrosius Bach)'의 여덟째이자 막내 아들로 태어납니다. 당시 바흐의 가까운 친인척 중에는 음악가가 아닌 사람이 별로 없을정도로 전통적인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것인데, 직계로는 바흐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2명의 친형이 작곡가였고 방계까지 따지면 큰할아버지, 당숙, 삼촌 등 모두 십수명의 작곡가 또는 연주자가 배출된 독일 최고의 음악 명문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나중에 태어나는 바흐의 아들, 조카, 손자까지 합하면 바흐 성을 가진 당대 음악인 수는 20명이 훨씬 넘습니다.

 

(필립 슈피타, Philipp Spitta가 저술한 바흐전기의 1899년판 영어 번역본 속표지)

 

 

'포르켈'이 1802년 바흐 연구서를 처음 출간한 이후, 1873년 '필립 슈피타(Philipp Spitta)'란 독일 음악사학자가  1천 페이지에 달하는 바흐 일대기를 집필했는데 이 책의 처음 100여 페이지는 바흐의 집안 음악가들 이야기가 차지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처럼 온통 음악가 천지였던 집안 분위기 속에서 바흐는 아버지와 형들에게 바이올린, 오르간 등을 배우며 자연스럽게 작곡가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바흐의 유아기에 관해서는 별다른 기록을 찾기 어렵습니다. 가장 상세하다는 슈피타의 전기에서도 바흐의 이야기는 출생 장면 다음에 바로 그의 부모가 사망하는 대목으로 건너뛰고 있습니다. 

바흐의 어머니 '마리아 엘리자벳'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것은 1694년, 바흐가 9살 때입니다. 아버지 '요한 암브로시우스'는 아내를 잃은지 7개월만에 과부 '바바라 마가레타'와 재혼하여 가정의 안정을 되찾는 듯 했으나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아버지도 재혼 두달이 지난 어느날 49세의 젊은 나이로 느닷없이 전부인을 따라가 버립니다.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지만 다행히 큰형 '요한 크리스토프(Johann Christoph)'는 오어드루프(Ohrdruf)시 미하일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일하면서 막 신혼살림을 꾸리고 있었고 둘째형 '요한 야콥'은 아버지가 일하던 아이제나흐시 음악장 자리에  도제로 들어가 있었습니다. 당시 10살짜리 어린 바흐의 양육은 가정이 있으면서 바흐보다 14살 많은 큰형의 몫으로 돌아갔고 그 때부터 바흐는 고향 아이제나흐를 떠나 오어드루프의 큰형 집에 얹혀 살게 됩니다.  

 


6.  오어드루프의 큰형 집에 얹혀 살며 악보를 훔쳐 배운 바흐

바흐는 오어드루프에서 5년을 지내게 되는데 전기 집필자 슈피타는 바흐의 성장기에 가장 음악적 영향력이 컸을게 확실한 큰형 '요한 크리스토프'가 바흐에게 과연 어떠한 음악적 교육을 베풀었는지, 또 그 자신의 음악적 역량은 어떠했는지 세밀히 조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흐는 유아기부터 아버지에게서 바이올린과 음악 이론을 배웠고 그 당시까지 바흐가에서 가장 유명했던 작곡가인 아버지의 쌍동이 형, 그러니까 바흐의 큰아버지 '요한 크리스토프' (Johann Christoph, 큰형과 이름이 동일함) 에게서도 오르간 등 음악지도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는 큰 형에게서 받은 교육이야말로 바흐의 위대한 음악적 성취를 가능케 한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하는 가설을 증명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좌측: 아이제나흐의 Bach Haus, 박물관이며 생가는 근처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됨, 우측: 오어드루프 시청광장)

 

 

슈피타는 우선 큰형 '요한 크리스토프'의 음악적 역량에 관해서는 몇가지 정황증거를 통해, 그래도 오어드루프 인근에서는 상당히 인정받는 작곡가였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그가 당시 독일 최고의 작곡가였던 '요한 파헬벨(Johann Pachelbel, 1653 ~ 1706)'의 학생으로 3년간 공부했으며, 1695년 파헬벨이 고타(Gotha)시 음악장 자리를 사임하자 '요한 크리스토프'에게 후임 제의가 들어온 적이 있는데, 비록 추측이지만, 이는 파헬벨이 자신의 후임으로 그를 추천한 때문이고 결국 그는 파헬벨이 인정할만큼 괜찮은 실력을 갖췄을거라는 추론입니다. 또 한가지는  '요한 크리스토프'가 5명의 아들을 모두 음악가로 키워서 나중에 오어드루프와 인근 도시의 음악장이나 오르가니스트로 취업시켰는데, 이처럼 다섯명씩이나 괜찮은 자리에 앉히기는 결코 쉽지 않은 일로서 그의 음악적 명망과 후광이 꽤 컸기 때문에 가능했을거라는 짐작입니다.

그렇다면 어느정도 음악적 역량은 있었다고 판단되는 큰형  '요한 크리스토프'는 바흐에게 어떤 가르침을 베풀고 영향력을 미쳤을까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큰형은 바흐의 음악성이 뛰어나다는 점을 알았을텐데도 불구하고 그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특별지도를 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동생의 천재성을 억누르는 듯한 태도를 보인 것으로 파악됩니다. 처음에 큰형은 바흐에게 천천히 애들 수준의 음악지도를 하면 되려니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흐가 자신이 주는 악보와 음악이론을 금새 익혀버리고 좀더 어려운 악보를 달라고 자꾸 보채기 시작하자 악보를 모두 철망으로 가려진 서가에 잠가두고 바흐의 접근을 금지했다고 합니다. 슈피타는  '요한 크리스토프'의 이런 행동이 '선배적 교만심' (Pride of Seniority) 때문이었다고 쓰고 있습니다. 당시 악보라는 것이 워낙 구하기 어렵고 비싼 때문도 있지만, 쬐끄만 녀석이 어른인 자신도 버거워 하는 어려운 작품들을 척척 소화해 낸다는게 영 마땅치 않았을거라는 해석입니다. 

아무튼 형의 이런 견제도 바흐를 막을 수는 없었나 봅니다. 바흐는 매일 밤 몰래 서재로 가서 철망을 뜯고 악보를 베끼기 시작합니다. 어두운 달빛 아래 악보를 옮겨 적으면서 바흐는 얼마나 많은 것을 배우고 깨우쳤던 것일까요. 바흐는 6개월에 걸쳐 형이 가지고 있는 악보를 모두 필사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얼마있지 않아 훔친 악보를 들키고 맙니다. 큰형은 아주 매몰차게 모든 악보들을 회수해 버립니다. 이 사건 이후로는 사실상 바흐가 큰형에게 음악을 배웠다고 할만한건 없지 않겠느냐는게 슈피타의 주장입니다. 다만, 바흐는 큰형의 악보 중 상당수를 차지했을 '파헬벨'의 악보를 베끼면서 알게 모르게 당대 최고 작곡가의 작곡 기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을것으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7. 뤼네부르크의 성 미하일 학교에 소프라노로 스카웃되어 큰형에게서 독립

큰형에게 음악적으로는 큰 배움을 얻지 못했어도 바흐가 당시 6년제인 초중등학교에서 작문, 산수, 신학, 라틴어, 그리스어 등 기초 소양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큰형 덕분이라 할 수 있겠죠.  당시 바흐가 다니던 학교는 매우 종교적으로 경건한 분위기였으며 어린이 성가 합창단을 구성해서 자주 외부 공연을 함으로써 학교 재정의 부수입원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바흐는 라틴어와 성경을 배우고 합창단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열심이었습니다. 그는 어른이 되어서 누구보다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아마도 어린 시절의 이러한 성경교육과 합창활동의 영향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그가 남긴 말이나 메모 중에는 "음악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영혼의 회복이어야 한다.", "봉헌음악이 있는 곳에는 늘 하나님이 은혜로 임재하신다."라는 구절들이 발견되고 있어 그의 신앙적 음악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작은 행복도 바흐에게는 오래 허락되지 않습니다. 점차 조카들이 생기고 집이 비좁아 지면서 큰형에게 마냥 신세 질 수도 없는 상황이 됩니다. 슬슬 형으로부터 독립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마침 학교의 음악선생님 '엘리아스 헤어다(Elias Herda)'가 뤼네부르크 (Lüneburg)의 '성 미하일' 학교 성가대 장학생 자리에 바흐를 추천합니다.  서기 1700년 4월, 막 15살이 된 바흐는 함께 추천받은 학교친구 한명과 더불어 뤼네부르크로 갑니다. 여기서 바흐는 비록 많은 돈은 아니지만 장학금을 받으면서 경제적으로 완전히 홀로서게 됩니다.

 

 

(오어드루프는 고향 아이제나흐에서 가까운 작은 도시였지만, 뤼네부르크는 북쪽으로 380킬로나 떨어진 큰 도시였습니다.)

 

 

많은 자료에서 바흐가 성 미하일 학교에 들어가게 된 것은 무엇보다 그의 아름다운 소프라노 미성 때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슈피타는 '성 미하일' 학교의 장학재단이 단지 노래를 잘 부른다는 한가지 이유만으로 바흐를 스카웃할만큼 허술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당시의 성가 합창단에는 남자 소프라노의 필요성이 절대적이었습니다. 중세유럽의 교회에서는 여자가 노래를 부를 수 없었기 때문에 여자의 소프라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남자가 꼭 필요했지요. 그래서 변성기가 되기 전에 아예 거세를 하고 영원히 소프라노 음성을 보존하는 '카스트라토(아래 별도 포스트 참조)'라 불리는 남자 소프라노가 각광을 받던 시절이기도 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바흐의 키는 5피트 11인치, 즉 180cm 정도로 상당히 큰 편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초상화를 봐도 체구가 크고 선이 굵은 느낌이 나는데 그가 아무리 어린 나이지만 가늘고 높은 여자 목소리를 냈었다는게 신기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그의 고운 소프라노 음색이 성 미하일 학교에 들어가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노래실력이 결정적인 이유는 아닌게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그가 채용되고 얼마 안있어 변성기를 맞게 되고 소프라노는커녕 한동안 노래 한곡조차 부를 수 없었지만, 학교측은 그를 내친 것이 아니라 바이올린, 오르간 등 합창단 반주자로 일하게 했고 그를 위해 소규모 관현악단까지 구성해 외부공연 기회를 열어 줬으며 목소리가 회복된 후에는 합창단의 비중있는 리더 역할을 맡겼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서 바흐는 자기 집안의 음악적 명성 때문에 다소간 음덕을 입은 경향도 없지 않으나 이미 그의 악기 연주능력과 음악적 소양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주변의 인정을 받았던 것으로 분석됩니다. 바흐는 뤼네부르크에 있는 동안 자신의 오르간 선생님인 '게오르크 뵘(Georg Böhm)'으로부터 많은 지도를 받고 특히 '뵘'이 오르가니스트로 일하던 '성 요한 교회(St. John's Church)'의 대형 오르간을 치면서 연습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얻게 됩니다. 또한 인근에서 당시 유명한 작곡가로 '뵘'의 스승이기도 한 '요한 라인켄(Johann Reincken)' 으로부터도 어깨너머로 작곡과 연주기법을 배우게 됩니다. 

 

 

(뤼네부르크의 성 미하일 교회)

 

 

8. 바이마르 - 아른슈타트 - 뤼벡 - 뮐하우젠을 전전하는 떠돌이 생활 5년, 그리고 결혼

1702년 겨울 '성 미하일' 학교 졸업을 앞둔 바흐는 고향 근처의 '장거하우젠(Sangerhausen)'시 야콥교회의 오르가니스트 자리에 지원하지만 어느 귀족의 인사개입으로 퇴짜를 맡습니다. 이 때부터 한번 꼬이기 시작한 바흐의 인생은 좀처럼 풀리지 않습니다. 가는 곳마다  주어진 일이나 대우가 변변치 않고 고용주와 불화가 생기는 등 한자리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는 봐주기 안쓰러운 고난이 이어집니다. 

(바이마르)
1703년초 바흐는 바이마르(Weimar)시에 생애 첫 직장을 얻게 됩니다. 바이마르는 그의 할아버지가 빌헬름 대공의 궁정악장으로 일했던 곳인데 바흐가 여기에 취업한 것은 할아버지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이마르의 주인인 '빌헬름 에른스트' 대공의 휘하가 아닌 그의 동생 '요한 에른스트' (Johann Ernst III) 공에게 채용된 것인데, 공식직책이 House Musician으로 '요한 에른스트' 의 사설 관현악단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하면서 하인 역할도 겸하는 아주 모호한 일자리였습니다. 할아버지의 후광이나 뤼네부르크에서 쌓았던 연주실력 등이 전혀 반영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바흐는 바이마르에서 지내는 동안 음악 외에 허드렛 일까지 해야하는 자신의 처지가 몹시 못마땅했겠지만 다행히 바이마르 사람들이 좋아했던 당시 이탈리아 음악의 새로운 악풍과 작곡기법을 접할 수 있었고 점차 자신의 오르간과 하프시코드 연주실력을 인근 도시에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는 점에서 아주 무의미한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1703년 8월 바흐는 바이마르 인근의 아른슈타트시 (Arnstadt) 신교회(Neue Kirche, 현재는 바흐교회-Bach Kirche) 오르가니스트로 이직합니다.

 

 

(아른슈타트 신교회, 현재는 바흐교회)

 

 

(아른슈타트)
아른슈타트는 이전에 바흐집안 음악가들이 많이 활동했던 작은 도시로 바흐는 그럭저럭 4년정도를 여기서 지내게 되는데 그렇다고 이 곳에서의 음악여정도 아주 순탄했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오르간 연주에만 전념하고 싶어 했으나 성가대 학생들의 음악지도까지 해달라는 교회측과 마찰이 잦았고 더구나 성가대원의 자질부족에 실망이 컸다고 합니다. 한번은 구제불능의 어느 성가대 학생에게 심한 욕설을 한 모양입니다. 그 학생은 모멸감에 몽둥이를 들고 바흐를 좇아다녀 길거리 난투극까지 벌어졌다고 하니 참으로 '음악의 아버지' 체면이 말도 아니었겠습니다. 더구나 바흐는 교회측에 학생의 징계를 요구했는데 교회는 학생에겐 솜방망이 처벌을 내린 반면 바흐에게는 학생들을 너무 심하게 대하지 말라는 경고를 했다고 하니 아마도 바흐의 속은 뒤집어졌을게 틀림없습니다.

아무튼 이런 사건들을 보면 조금은 바흐의 오르간에 대한 편집적인 애착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관찰됩니다. 하프시코드나 오르간이나 같은 건반 악기이지만 바흐의 작곡연습에 있어서는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프시코드에서는 울려 퍼지면서 길게 끄는 음정을 내기 어렵지만 오르간에선 가능하기 때문에 바흐에겐 오르간으로 연습할 필요가 절실했습니다. 하지만 오르간은 큰 교회에나 간간이 비치된 것으로 쉽게 접할 수 없는 악기라서 바흐는 성능이 좋고 대형인 오르간을 만질 수 있는 기회만 있다면 만사를 제쳐 두고 좇아다닌 것으로 전해집니다.

(뤼벡)
바흐의 이같은 오르간 사랑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 바로 '뤼벡'(Lübeck) 휴가와 무단결근입니다. 그는 1705년 10월, 한달간의 휴가를 내고 북쪽으로 470km나 되는 먼 거리를 걸어서 뤼벡으로 갑니다. 이는 당시 오르간 연주자와 작곡가로 유명했던  덴마크계의 '디트리히 북스테후데' (Dieterich Buxtehude, 1637~1707)를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북스테후데와의 만남은 바흐의 오랜 버킷 리스트중 하나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이미 70살 고령이었던 대선배 북스테후데를 만난 바흐는 그동안 풀지 못했던 오르간 연주와 음악에 대한 갈증을 푸느라 휴가기간이 끝난줄도 모릅니다. 아니면 더이상 북스테후데와 함께할 시간은 없을거라는 예감을 느낀 때문인지도 모르죠. 바흐는 휴가기간을 한참 넘겨 다음해 1월까지 무단결근을 하면서 뤼벡에 머뭅니다. 그 때문에 바흐는 또 아른슈타트 교회로부터 징계를 받습니다.

(뮐하우젠)
1706년 6월 바흐는 인근 도시 뮐하우젠(Mühlhausen)의  블라지우스 교회(Blasiuskirche)에 오르가니스트로 지원하여 채용됩니다.  바흐는 이 곳에서 불과 9개월 밖에 지내지 않지만 그래도 많은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고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는 등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습니다. 그의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Maria Barbara)는 아른슈타트에서 그의 음악일을 도와주다가 사랑한 사이로 발전한 육촌 누이였습니다. 그가 변변치 않은 수입에도 결혼을 할 수 있었던건 마침 외삼촌 한 사람이 죽으면서 그에게 반년치 연봉에 상당하는 유산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바흐에게는 생전 처음 겪는 넝쿨째 굴러온 횡재가 아니었을까요. 

바흐는 마리아가 1720년 사망하기까지 그녀와의 사이에 7명의 아이를 낳습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 두번째 부인 '안나 막달레나(Anna Magdalena)'와 재혼하여 다시 13명의 아이를 낳습니다. 어려서 죽은 아이들이 그 절반인 10명이나 되지만 여하튼 모두 20명의 자식을 낳은 셈이니 자식 복만큼은 웬만한 황제 부럽지 않습니다. 그의 음악 작품이 1천곡이 넘어서 바흐를 다작 작곡가, 즉 Prolific Composer 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Prolific이란 단어가 원래 '자손이 많은'의 뜻이라는 점에서 바흐는 그야말로 '다작 다산 작곡가' (Prolific Composer)란 호칭이 딱 어울린다 하겠습니다.

바흐가 뮐하우젠을 떠나게 된 것은 당시의 종교적 이념논쟁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이 작은 도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기존의 루터파와 철저한 경건주의를 강조하는 칼빈파로 나뉘어져 서로 옳다고 으르렁거렸는데 루터파는 음악예술을 예배의 좋은 도구로 삼은 반면 칼빈파는 음악이 경건을 해친다하여 배척한데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흐는 사실 칼빈파에 가까울 정도로 경건을 우선시 하는 독실한 신자였지만 음악을 배척하는 무리들과는 도저히 함께 할 수 없었을겁니다. 바흐는 자신의 첫 걸작 칸타타 "하나님은 나의 왕" (God is my King, BWV71)을 공연한 후 가족을 데리고 조용히 뮐하우젠을 떠납니다.(하편에서 계속)

 

 

J. S. Bach: Gott ist mein König - 하나님은 나의 왕 (BWV 71) (Koopman)

 

 

참고사항

카스트라토(Castrato)란?

 

영어로 Castration은 '거세'란 뜻입니다. 남자 구실을 못하게 만드는 것이죠. 동양에서는 주로 왕실의 내시들에게 행해졌던 것인데 서양에서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음악예술을 위해 거세가 자행되었다고 하니 믿어지지 않는군요. 중세유럽에는 목소리가 가늘고 고운 어린 소년들을 뽑아서 변성기가 오기 전에 거세를 함으로써 평생 고음의 여성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남자 소프라노를 양성하는 일이 아주 흔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거세된 남자 소프라노를 바로 카스트라토(Castrato)라 불렀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여성이 아닌 남성 소프라노가 필요했을까요?  바로 성경 고린도전서 14장 34절에 나오는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고 적용했기 때문이라 합니다. 이 구절을 여자는 교회에서 노래도 부르면 안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무식한 교회 책임자들 때문이었죠. 현대 신학자들의 해석에 따르면, 고린도 전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글인데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일부 여성 신도들이 여성 우위의 이단적인 교리를 들먹이면서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사건이 많았고 바울은 이에 대한 경고의 말씀을 전한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의 잘못된 문자적 해석 때문에 수백년간 유럽의 어린 소년들 수만명이 거세당하는 불운을 겪게 된겁니다.

그래서 당시 교회 성가대는 물론이고 일반 오페라 공연에서도 카스트라토가 많이 활동하게 되었고 일부 유명한 카스트라토는 엄청난 부와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는군요.  카스트라토 제도는 로마교황이 1878년 카스트라토의 고용금지령을 내리기까지 계속 됐다고 하니까 이런 비인권적 행태가 불과 100여년전까지도 계속된 셈입니다. 역사상 가장 유명했던 카스트라토는 이탈리아의 파리넬리(Farinelli, 1705~1782)라는 이름의 오페라 배우로 그의 일대기는 영화화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카스트라토는 역시 이탈리아의 알레산드로 모레스치(Alessandro Moreschi)로 1922년 사망했습니다.

 

(카스트라토, 파리넬리, Farinelli)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