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반응형

텔레만 상편에서 이어집니다.

 

 

6. 라이프치히에서 폴란드 '조라우'로 - 음률에 글로벌한 색채를 입히다
  
텔레만은 어머니에게 법률공부와 음악활동의 병행을 허락 받은 이후, 사실상 법률공부는 집어치우고 모든 시간과 열정을 음악활동에 바친 것으로 보인다. 어떤 기록에서도 더이상 법학공부에 관한 기록은 전혀 찾아 볼 수 없고, 시간이 흐르면서 라이프치히 시장과 당초 약속했던 두주일에 한곡을 써주는 정도에서 벗어나 본격적이고 다양한 작곡활동을 벌인 것으로 나타난다.

'성 토마스' 교회 뿐 아니라 '니콜라이' 교회에도 성가곡을 써주기 시작했으며, 대학내 음악 동아리 '콜레기윰 무지쿰' (collegium musicum)을 결성해 당시엔 흔치 않은 일반 시민 대상 열린음악회를 열기도 하고 그 다음해인 1702년부터는 라이프치히 오페라 하우스의 지휘자가 되어 20여곡의 오페라를 작곡해 공연하는데 이 중 몇 곡은 프랑크푸르트, 베를린, 폴란드의 조라우(Sorau, Zary) 등 해외에서 공연되기도 한다. 또 새로 건축된 라이프치히 교회(NeuenKirche)의 오르가니스트이자 음악장으로 임명되는데 아마도 이 때부터를 텔레만의 공식적인 작곡활동 시점으로 봐야되지 않을까 모르겠다.

이 시기에도 그는 자신의 작곡역량을 높이기 위해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당시 '성 토마스' 교회의 음악장이었던 '요한 쿠나우' (Johann Kuhnau)의 푸가와 대위법 (Counterpiont)을 많이 참고했으며 특히 할레를 오가면서 헨델과 작곡기법에 관한 수많은 토론을 통해 공부했다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작곡가 '요한 쿠나우'를 좀더 살펴 보면, 그를 텔레만의 라이벌이라고 표현한 자료들이 많지만 그는 텔레만보다 20년 정도의 대선배로 라이벌이라기 보다는 껄끄러운 선후배 관계였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성 토마스' 교회의 음악책임자로서 어린 녀석이 자의든 타의든 자신의 영역인 예배음악 작곡에 불쑥 끼어든 것도 못 마땅했을텐데, 텔레만이 음악활동을 늘리면서 자신의 제자들까지 몇명 빼가는 사태에 이르자 상당한 갈등관계가 벌어졌다고 한다. 텔레만은 대선배와의 불편한 관계를 견디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며 결국 1704년 라이프치히를 떠나 폴란드 '조라우'로 옮기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조라우'는 폴란드 서부지역의 작은 도시로 지금은 '쟈리'(Zary)라고 부르는 도시이다. 당시는 폴란드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 삭소니 지역의 영주였던 '에어드만 폰 프롬니츠 2세'가 다스리던 곳이었는데 '프롬니츠 2세(Promnitz II)'는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 각국의 음악에 정통한 음악애호가였다. 텔레만은 이 지역에서 1708년까지 약 4년간 음악장으로 지내면서 특색있는 각국 음악가와 교류하고 새로운 음악세계를 경험하면서 한단계 높은 음악의 경지에 들어서게 된다.

(폴란드 백파이프와 바이올린, Polish Bagpipe and Violin)

 

그는 '조라우'에서 어느날 36개의 백파이프와 8개의 바이올린이 합주하는 음악을 처음 듣고 그 순간의 감동을 평생 간직하면서 그 때의 영감을 바탕으로 그동안의 성악곡 위주에서 3중주, 콘체르토, 서곡 등 다양한 기악곡을 작곡하는데 더 힘을 기울이게 된다.  그의 전임자인 '볼프강 프린츠(Wolfgang Printz) 등 당시 최고의  음악 이론가들과 지식을 교환하고, '륄리'나 '캄프라' 같은 외국 작곡가들의 최신곡을 통해 유럽 각국의 작곡흐름을 배우면서 텔레만 음악의 특색이랄 수 있는 독일의 세밀함, 프랑스의 세련미, 이탈리아의  우아함, 폴란드의 야성미 등이 녹아있는 글로벌한 음악적 색채가 이 곳에서 형성된다.

그는 자서전에서 "조라우 이전의 나는 불 위에 수많은 냄비를 올려 놓고서 겨우 한두가지만 맛볼 수 있게 해주는 요리사였다면, 그 이후의 나는 완벽한 코스요리를 서비스하는 주방장, 다시 말해서 기악과 성악에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세계를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작곡가로 성장하는 시기였다"고 자평하고 있다. 더구나 그는 1709년 이 곳에서 첫번째 결혼식까지 치른다. 이 때는 이미 아이제나흐에서 음악활동을 하던 때인데, 굳이 조라우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등 텔레만에게 있어 조라우는 음악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중요한 의미를 가진 도시임이 분명하다. 그래서인지 그의 조라우 체류기간이 그리 길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폴란드 '쟈리'시는 지금도 '텔레만의 도시' (The City of Telemann) 라는 별명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매년 텔레만 기념 음악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특히 2017년에는 그의 타계 250주년을 맞아 6월 25일부터 연말까지 일련의 기념 연주회 및 공연행사를 계획 중이라고 한다.

(현재의 폴란드 Zary시 - 당시 Sorau시 - 중앙스퀘어 분수 앞에 텔레만의 좌상이 설치되어 있다. Zary시에는 지금도 Telemann의 이름을 딴 음악학교가 있으며, 매년 12월 첫째주 텔레만을 기념하는 청소년축제를 개최하고 있다고 함.)

 

7. 아이제나흐 - 프랑크푸르트 - 함부르크로 이어지는 텔레만의 전성기 : 대중에 다가가는 음악가

1708년 '조라우'에서 '아이제나흐' 지역의 영주인 '요한 빌헬름' (Johann Wilhelm) 공작의 궁정 악장으로 자리를 옮긴 텔레만은 많은 성가곡과 콘체르토, 칸타타, 오페레타, 세레나데 등을 작곡하면서 음악활동의 꽃을 피우게 된다. 이 곳에서 4개의 칸타타 사이클을 완성했으며 많은 가사를 직접 작사하고 때로는 바리톤으로 직접 노래까지 불렀다고 한다. 그의 비중이 너무 컸는지 아이제나흐 시는 그가 1712년 프랑크푸르트로 옮겨간 후에도 1717년까지 음악장의 자리를 공석으로 뒀으며 그 이후에도 계속 텔레만과의 음악적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텔레만의 음악활동 지역을 크게 라이프치히(1701~1704), 조라우(1704~1708), 아이제나흐(1708~1712), 프랑크푸르트(1712~1721), 함부르크(1721~1767) 등으로 구분한다면, '라이프치히'에서 '조라우', '아이제나흐'까지의 시기는 자신의 음악적 역량을 절차탁마하고 더욱 풍성하게 만든 성장준비 기간으로 볼 수 있겠고, 프랑크푸르트와 함부르크 생활의 전반기 즉, 1712년부터 나이 60 되기 전인 1740년까지의 약 30년간은 그야말로 텔레만의 최대 전성기라고 할 수 있겠다.

텔레만은 오랫동안 정들었고 든든히 자리 잡았던 아이제나흐에서 프랑크푸르트로 옮기게 된데 대하여 " 나도 왜 아이제나흐를 떠나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누군가로부터 '평생 의탁할 수 있는 자리를 원한다면 프랑크푸르트에 정착하라'는 말을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 시와 여러 교회의 음악장으로 일하면서 독일 최고의 음악가로 인정받게 된다. 그가 본격적으로 작곡앨범을 출판하기 시작한 것도 여기서부터인데 그의 출판악보는 많은 유명 음악가들이 구입해서 참고했을 뿐 아니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거의 모든 유럽국가로부터  주문이 이어졌다고 한다. 특히 프랑크푸르트에서 텔레만의 연봉은 1600 플로린(Florin)으로 당시 인근의 음악가 중 최고 수준의 보수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텔레만이 일했던 궁정과 교회들; 좌측: 아이제나흐 궁정, 중앙: 프랑크푸르트 Barfüßerkirche[맨발교회], 우즉: Katharinenkirche[카타린교회)

 

이처럼 승승장구하면서 프랑크푸르트를 음악인생의 마지막 도시처럼 생각했던 텔레만은 함부르크 시의 음악거장인 '요하임 게어슈텐뷔텔' (Joachim Gerstenbüttel)이 1721년 사망하자 그의 후임자로 초청받게 된다. 텔레만은 결국 이 초청을 받아들여 푸랑크푸르트를 떠나 그의 마지막 종착지 함부르크로 이전하게 되는데, 함부르크의 자리가 좀더 비중있는 측면도 있었겠지만, 어떤 기록을 보면, 일찍부터 작품의 저작권 문제에 많은 신경을 써온 텔레만이 다른 도시에 비해 좀 더 저작권 보호 시스템이 잘 갖춰진 함부르크를 새로운 활동지역으로 택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함부르크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후, 이번엔 라이프치히 음악계의 터줏대감이자 텔레만의 불편한 선배였던 '요한 쿠나우'가 사망했고, 텔레만에게 그의 후임 음악장을 맡아 달라는 초청장이 날아오게 된다. 이처럼 굵직한 자리가 비기만 하면 1순위로 초청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 음악계에서 텔레만을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어릴 적 '쿠나우' 때문에 떠날 수 밖에 없었던 라이프치히는 사실 텔레만이 오래 전부터 꿈 꿔 왔던 자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함부르크도 쉽게 내놓고 싶은 자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고심 끝에 라이프치히의 초청사실을 빌미로 함부르크 당국자들과 협상하여 연봉 10% 인상 등 좀 더 나은 대우를 보장받는 대신에 라이프치히 행을 포기하고 만다. 재미있는 것은 텔레만의 거절로 공석이 된 라이프치히 음악장 자리는 2순위 후보도 무슨 일로 포기함으로써 3순위 후보에게 차례가 돌아 갔는데, 그 3순위 후보가 바로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라고 한다.

텔레만은 함부르크에서 '요한 라틴어학교' (Johanneum Latineschule)와 5개 교회의 음악장을 겸하고 다른 도시들의 음악 일까지 봐주면서 죽을 때까지 사실상 독일 최고 음악가로서의 명예를 누리게 된다. 텔레만은 그동안 스쳐 온 많은 지역들과 단절되지 않고 계속 음악적 유대관계를 유지하여 함부르크에서 일하면서도 여전히 삭소니 지역의 음악장 칭호를 가지고 있었으며, 아이제나흐에는 수시로 궁정축제에 필요한 타펠무직 등을 만들어 주었고, 프랑크푸르트에도 매 3년마다 한번씩 성가곡을 작곡해 주었다. 또 1726년부터 독일 중남부 작은 도시 '바이로이트' (Bayreuth) 시의 비상근 음악장을 맡아 오페라와 기악곡을 정기적으로 써 주었다고 하니 그의 음악적 영향력은 전 독일에 걸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그는 또 함부르크에서 스스로 출판사를 설립하여 악보 간행사업도 벌였는데, 1740년까지 자신의 출판사를 통해 출간한 악보집은 모두 46권에 달했으며, 독일 각지와 영국 런던, 네덜란드 암스텔담 등의 대형 서점을 통해 판매됐을 뿐 아니라 유명 음악가들에게 신작 카탈로그를 배포해 주문을 받기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출판 비용을 아끼기 위해 인쇄용 동판을 직접 제작하기도 했다고 한다. 1728년에는 뜻을 같이 하는 동료 음악가 몇명과 함께 독일 최초의 음악 잡지를 간행하여, 악보와 음악이론을 일반대중에 보급함으로써 음악진흥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특히 텔레만을 다른 음악가들에 비해 높이 평가하고 싶은 점은 물주가 되는 교회나 궁정의 상류층 인사를 위한 작곡에만 몰두한 것이 아니라, 학생 시절 라이프치히에서 그랬던 것처럼 소규모 악단을 조직해서 일반 서민을 위한 음악회를 자주 열었다는 점이다. 당시 함부르크 궁정이나 도시의 권력자들은 자기들이 고용한 음악장이 고급스런 음악당에서 귀족 엘리트만 모인 가운데 우아하게 연주해 주기를 바랐으며, 저렴한 공개장소에서 일반 대중을 상대로 공연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나, 텔레만은 개의치 않고 서민 대상 공개음악회를 과감히 밀어붙였다고 한다. 그러자 점차 상류층 인사와 비판자들도 서민 음악회에 참석하기 시작했으며 프로그램도 더욱 다양해졌고 나중에는 서민 전용의 음악당이 건설되는 개가를 올렸다고 하니, 전편에서 언급했던 텔레만의 '음악 실학자'로서의 면모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함부르크 Peterstraße 39 에 있는 텔레만 박물관 - 텔레만 뿐 아니라 함부르크에서 활동한 여러 음악가의 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다. 2011년 텔레만과 브람스 전시실이 오픈되었고, 2015년 필립 엠마누엘 바흐 등의 전시실도 개설되었다)

 

 

8. 여자 복은 지지리도 없는 텔레만 - 예술가답게 시와 오페라와 팬과 더불어 살다

텔레만의 음악인생은 이처럼 큰 풍파없이 부와 명예로 점철되는 듯 보였으나, 개인적으로 들여다 보면 그다지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그는 여자 복이 없었다. 앞서 언급했던  '조라우' 궁정의 시녀이자 작곡가 '다니엘 에벌린' (Daniel Eberlin)의 딸인 첫번째 아내 '아말리아' (Amalia) 는 첫 아이를 낳은 후 얼마 안있어 죽는다. '아말리아'와의 결혼생활은 단지 15개월에 불과했으며, 그녀를 잃은 텔레만은 한동안 깊은 슬픔에 빠진다. 그녀를 생각하면서 1711년 '시적 상념과 처방' (Poetic Thoughts and Recipes)이란 제목의 시집을 출판하기도 한다.

프랑크푸르트로 옮겨 몇년이 지난 후 텔레만은 시 공무원의 딸인 '마리아 텍스터' (Maria Textor)라는 이름의 어린 소녀를 집안일 돌보는 하녀로 고용했으며, 1714년 그녀가 16세의 성년이 되자 그녀와 두번째 결혼식을 올린다. 물론 당시는 자신의 어린 딸에게 새엄마를 안겨 준 셈이고 스스로는 홀아비를 면하고 프랑크푸르트의 시민권도 얻게 된 의미있는 결혼이었다. 하지만, 이 결혼은 17살의 나이 차 때문이었을까, 텔레만에게 엄청난 고통만 안겨주고 끝나게 된다.

함부르크 사교계에 '마리아'의 부적절한 남자관계에 대한 루머가 퍼지기 시작한 것은 1724년부터였다. 당시 독일 최고의 음악가와 하녀 출신 어린 새댁에 대해 연예계 기자들이 얼마나 촉각을 곤두 세우고 있었을 지는 안봐도 비디오가 아니겠는가. 시간이 지나면서 소문은 '마리아'가 스웨덴 군 장교와 바람이 나서 요즘 말하는 클럽이나 호텔에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는 식으로 구체화됐으며 사람들은 텔레만에 대해 '노친네가 어린애랑 결혼하더니 마누라 간수도 제대로 못한다'고 조롱하기 시작했고 또 한편으론 '마누라 잘못 만나 음악인생 망치는거 아니냐'는 동정론이 일기도 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텔레만의 반응이다. 그는 괴로워 하거나 슬럼프에 빠지거나 하지 않고 오히려 아주 웃기는 코믹 오페라를 작곡해 발표하는 식으로 예술가다운 대응을 하는데, 그중 한 오페라는 "베스페타와 핌피오네의 불평등한 결혼 또는 하녀 길들이기" (Die Ungleiche Heirat zwischen Vespetta und Pimpinone oder Das herrschsüchtige Kammer Mägdchen)라는 아주 긴 제목을 가지고 있다. 제목이 너무 길어서 보통 "핌피오네"로 줄여서 부르는 이 오페라는 나이 든 남자가 하녀와 결혼하게 되는, 바로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아이러니하게 엮은 것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동서고금에 늘상 있는 흔한 스토리로 만들어 버린 셈이다.

이 짤막한 코믹 오페라는 헨델의 대하 오페라 "타멜라노(Tamerlano, 1725년작, Tamerlane은 티무르 제국의 황제 아미르 티무르의 서양 이름)"의 중간 휴식시간(Intermezzo)을 활용해서 무대에 올려 대단한 성공을 거뒀을 뿐 아니라, 그 후 많은 작곡가들에게 '주인과 하녀의 결혼'이란 주제를 가장 인기있는 테마로 제공하게 되어  '죠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시' (Giovanni Battista Pergolesi)의 "안 주인이 된 하녀" (La serva padrona) 등 수많은 아류 오페라들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됐다고 하니, 자신의 치부까지 모두 음악의 소재로 삼아버리는 텔레만을 칭찬해야 할지 안쓰러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헨델의 대하 오페라 Tamerlano의 한장면)

 

이 정도면 아내 '마리아'가 정신을 차리고 제자리로 돌아와 주기를 바랐던 것일까. 그러나 '마리아'의 텔레만 괴롭히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녀는 외간남자와의 염문 뿐 아니라 값비싼 보석과 의상 등 과도한 사치와 도박에 빠져 엄청난 돈을 탕진하고 결국 텔레만에게 많은 빚을 떠 안게 만들었다. 독일 음악계의 최고 연봉자였던 텔레만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큰 빚이었다. 텔레만은 파산 직전에 친구들과 팬들의 모금으로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고 한다.

이같은 '마리아'의 계속된 일탈로 아마도 더이상은 부부관계 유지가 어려웠던 것 같다. 1735년 텔레만은 그녀를 프랑크푸르트의 친척에게 돌려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문헌에 따르면, 그녀가 텔레만의 남은 돈을 박박 긁어 챙겨서는 스웨덴 군인과 도망쳐 버렸다는 설도 있는데 이건 정말 믿고 싶지 않은 얘기다. '마테존'은 텔레만에게 슬쩍 '마리아와 아이들'에 관해 따로 질문을 한 모양인데, 텔레만은 자서전 말미에 '마리아'의 비행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 없이, '나의 아이들'은 첫째 부인에게 태어난 딸 하나를 포함하여 모두 7남 2녀인데 아들 둘이 어려서 죽고 현재 5남 2녀가 살아 있다고 쓰고 있다. 텔레만의 막내는 1726년 태어났다.



9.  마지막 작품 '마가 수난곡'을 발표하고 바로크 삼성 가운데 제일 늦게 세상을 뜨다.

텔레만은 1737년 프랑스 작곡가들의 초청을 받아 파리를 방문하는데, 해외여행 기회가 거의 없었던 텔레만에게는 인생 최대의 행복한 여행이었던 모양이다. 자서전의 마지막에 파리여행을 오래동안 꿈꿔왔던 여행이라면서 그 때의 흥분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파리에서 8개월간 머물면서 그동안 악보로만 접했던 많은 유명 작곡가들과 직접 만나 음악을 이야기 하고 수차례의 연주회도 가졌으며 특히 그 당시 파리의 '뛸레리 궁전' (Tuilelies Palace)에서 열리는 요즘의 열린음악회 'Concert Spirituel'에 독일인 최초로 참석하여 공연하는 행운도 누리게 된다. 그는 프랑스 왕을 배알하고 그가 프랑스에서 출판한 7권의 악보집에 대한 향후 20년간의 독점적인 출판권 보장 약속을 선물받는 등 인생 후반에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귀국한다.

(Paris의 뛸레리 궁전, Tuileries Palace, 1564년 지어져 앙리 4세부터 나폴레옹 3세까지 살았던 왕궁, 1871년 시민혁명으로 불타서 사라졌고 지금은 우측 사진의 Tuileries Garden이 들어서 있다. )

 

그 이후에도 텔레만의 작품 활동은 계속 되었으나 아무래도 환갑이 넘어선 1740년대부터는 작품 출판이 뜸해지면서 음악이론 연구와 후진 교육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또 당시 독일에는 화초 가꾸기가 한창 붐을 맞아 텔레만과 헨델도 화초재배에 푹 빠져 지냈다고 한다. 1754년 헨델이 텔레만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들이 화초가꾸는 취미를 공유하면서 얼마나 훈훈한 우정을 나눴는지 알 수 있다. 아마 프랑스로 출장가는 헨델에게 특이한 화초가 있으면 구해 달라고 부탁했었던 모양이다.

"텔레만 형.
나는 오늘 '쟝 카스텐'이란 친구에게
형이 갑자기 죽었단 소릴 들었지 뭐유.
근데 조금 있다가 달려와서 잘못된 뉴스라고 합디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우.
형이 지난번에 사서 보내라는 이국적인 화초들을 대부분 구해 놨거든요.
오늘 첫 차로 부칠테니 형이 좋아해 주면 더 바랄게 없겠수.
그리고 형 건강이 어떤지 자주 소식 좀 보내 줘요.
1754년 9월 20일
   프랑스에서 헨델 올림"

이처럼 텔레만의 건강을 걱정해 주던 헨델은 오히려 그보다 8년이나 앞서 세상을 떠난다. 헨델이 빨리 죽었다기 보단 텔레만이 비교적 장수한 셈이다. 1755년에는 큰 아들까지 앞세우게 되고 고아가 된 손자 '게오르크 미하일' (Georg Mechail)을 맡아 양육하는데 나중에는 꽤 유명한 작곡가로 자라게 된다. 전편에서 바흐와 헨델이 실명한 이야기를 했지만, 그 원인은 모두 요즘의 백내장이었던 것 같다. 텔레만도 70이 넘으면서 시력이 흐려지고 다리가 불편해져 거의 작품활동을 할 수 없게 되지만, 촛불이 꺼지기 직전 마지막 불꽃을 태운 것일까, 그는 1767년 그동안 함부르크에서 작곡해 낸 수많은 수난곡의 마지막 작품으로 '마가 수난곡'을 세상에 내놓은지 얼마 후 6월 25일 저녁 86세로 숨을 거둔다. 여기서 텔레만이 작곡한 진혼곡 하나 듣고 갑니다. 관상조인 카나리아의 죽음을 슬퍼하는 노래라고 합니다.

 

 

(카나리아의 죽음을 위한 노래 - Funeral music for a canary, 1737 - "O wie! O wie!", 오 어떻게!, 오 어떻게!, 텔레만의 세속적인 칸타타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힌다.)

 

텔레만의 장례식은 꽤 거창했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자세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다만, '성 요한(St. Johann)' 수도원 묘지에 묻혔다는 기록 정도만 발견되고 있다. 현재 이 수도원 자리에는 함부르크 시청이 들어서 있고,  시청 입구 좌측 한켠에 묘지석이 남아 있는데, 비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 곳은 텔레만이 1721년부터 1767년까지 봉직한 '요한 라틴어학교'가 있다가 그후 1841년까지 '성 요한' 수도원 묘지가 있었던 자리로서 1767년 6월 29일 텔레만의 유해가 안치되었다.  텔레만으로 인해 함부르크는 최고의 음악도시가 되었다."

(함부르크 시청 옆에 남아 있는 텔레만의 묘지석 내용)
(함부르크 시청 청사와 텔레만의 묘지석)

 

10. 텔레만에게 Mixed Taste Music (혼채음악, 混彩音樂)의 대가라는 새 호칭을...

1800년대 이후 바흐가 음악의 아버지로 부활하는 대신 저 깊은 어둠 속에 푹 파묻혀 버렸던 바로크의 명장 텔레만. 1900년대 중반 이후 그의 음악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지만 생존 당시의 영광과는 아직 거리가 멀다. 그토록 일반 시민과의 음악적 소통을 위해 노력했던 생전의 마음 씀과 노력에 비해 오늘날 그를 알아주는 대중은 너무 적다. 그를 소개하는 인터넷 기록들 중에는 Prolific Telemann 또는 Industrious Telemann이란 표현이 제일 많다. '다작의 텔레만', '부지런한 텔레만' 등 그가 작곡한 방대한 작품 숫자에 촛점을 맞춰 약간은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호칭들이다. 당대의 바흐, 헨델을 비롯해 수많은 국내외 음악가들에게 존경을 받았고 나중에 모차르트, 베토벤 등 초기 고전주의 음악가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텔레만이 오늘날 이처럼 홀대 받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텔레만 작품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연주가 많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클래식 음원 공급업체 '아카이브뮤직' (arkivmusic.com)에 따르면, 텔레만 작품의 음원 수는 겨우 852개에 불과하다. 오래 묻혀 있었던 비발디도 음원 수가 총 1,927개로 그중 '사계'  한 곡의 음원만 해도 226개에 달하며, 바흐의 경우는 더 대단해서 음원이 총 6,747개나 되는데 그중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만도 952개에 달하는 것이다. 그동안 텔레만의 수많은 작품 중  연주된 작품은 매우 제한적이었다는 얘기다.

텔레만의 음원을 좀 더 살펴 보면, 실내악이 320개, 협주곡이 270개, 관현악이 159개, 타펠무직이 70개 정도이고 다른 장르의 음원은 단지 몇개 씩에 불과하다. 텔레만 작품 중에서 그래도 가장 많이 알려진 곡을 대라면 'D장조 트럼펫 협주곡 51번' (Concert for Trumpet in D Major, TWV51 no. D7)을 꼽을 수 있는데 역시 이 곡의 음원 수가 텔레만 음원 가운데는 제일 많은 51개라고 한다. 그러나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아래의 B 장조 곡을 들어 보면 D 장조 51번보다 더 듣기 좋은 것 같다. 많이 들으면 더 익숙해지는 것이 아닐까.

 

(트럼펫 거장 Maurice Andre 가 연주한 Telemann Trumpet Concerto in B-Major)

 

다행이 해가 갈수록 텔레만 작품의 연주가 늘고 있다. 더구나 내년 2017년은  텔레만의 타계 250주년이다. 그의 고향 '마그데부르크'나 그가 음악활동을 했던 '쟈리', '함부르크' 등에서 뿐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텔레만 추모 연주회가 열릴 예정이라고 한다. 또 텔레만 음악의 보급에는 일본에서 창설된 '일본텔레만협회' (Telemann Institute Japan) 의 공도 크다.

이미 1963년부터 '텔레만 앙상블'이란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이 텔레만협회의 실내악단은 여러나라를 순회하면서 텔레만 등의 작품을 연주하고 있는데 1980년대부터는 바로크 시대의 전통악기로 텔레만 당시의 소리를 재현하여 오늘날의 음악애호가들에게 바로크 시대의 고유 선율에 가까운 음악을 전해주는 악단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이 악단의 창설자가 '강무춘'이란 이름의 한국인 교포 2세(일본이름은 노부하라 다케하루)라고 하니 더 관심이 간다. 그는 음대생 시절 텔레만의 대중에게 다가가는 '콜레기윰 무지쿰' 활동에 감명받아 작은 동아리를 조직한 것이 지금까지 계속되는 것이라 한다.

텔레만과 바흐 음악의 전문연구자인 미국 템플대의 '스티븐 존' (Steven Zohn) 교수는 'Music  for  a Mixed  Taste :  Style,  Genre,  and  Meaning  in  Telemann’s  Instrumental  Works' 이란 2008년도 저술을 통해 텔레만 음악이 가지고 있는 유럽 여러나라의 감성적 다양성, 바로크와 고전주의를 넘나드는 확장된 상상력,  그리고 텔레만 특유의 독특한 기악곡 형식 등을 한마디로 'Mixed Taste Music (혼채음악, 混彩音樂, 베타공간 번역)이라 명명하고 있는데 매우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좀 더 자주 텔레만의 Mixed Taste를 맛보는 기회가 마련되길 바랄 뿐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