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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작곡가 '게오르크 필립 텔레만' (Georg Philipp Telemann).  아마 많은 분들에게 생소한 이름일 지 모른다. 하지만 결코 가벼운 이름은 아니다. 바로크 시대를 대략 1600년부터 1770년까지로 본다면 이 기간 중 클래식 작곡가로 기록된 사람 수는 전 유럽에 모두 900명이 넘는데, 오늘날 동 시대의 대표 작곡가로 꼽히는 인물은 비발디를 비롯해 텔레만, 바흐, 헨델 등 몇사람에 불과하다. 약 300년이 흐른 뒤 그 시대의 대표 작곡가 4인의 한사람에 드는 것만도 대단한 일이지만, 이들의 생존 당시 유럽 음악계에서의 저명도를 따져보면 텔레만이 바흐를  훨씬 압도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가 지금 깨어난다면 "어쩌다가 바흐가 나를 제치고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게 된거지?"하고 고개를 갸우뚱할만큼 독보적인 비중을 가졌던 인물이 바로 텔레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텔레만은 비발디의 '사계'같은 히트곡이 없기 때문에 이름이 낯설 수 밖에 없다. 텔레만과 비발디는 유사한 점이 많다. 두 사람은 모두  상상을 불허하는 빠른 속도의 작곡 능력을 가지고 성악, 기악, 오페라 등 각종 음악 장르에 걸쳐 수많은 곡을 만들어 낸 다작 작곡가로서 생존시에는 유럽 여러 나라에서 인기를 얻었으나 사후에는 오랫동안 대중에게 잊혀졌다가 1900년대 중반에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거의 비슷하다. 다만, 부활 이후 비발디에겐 '사계'라는 협주곡 하나가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한 반면에 텔레만 작품 가운데는 아직 이렇다 할 히트곡이 나오지 않고 있을 뿐이다. 그의 작품 가운데는 아직 연주되지 않은 곡이 더 많다고 하니 앞으로 대중적인 히트곡이 하나 발굴되기를 기대하면서 텔레만의 삶과 음악을 정리해 본다.

 


1. 역대 최고의 다작 작곡가 텔레만의 음악세계 - 교회음악의 거장인가 식탁음악의 대가인가?

전편에서 비발디를 다작 작곡가로 소개한 바 있으나 그는 텔레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텔레만이야말로 역대 클래식 작곡가 가운데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정확한 집계는 없지만 후하게 잡아서 대략 비발디가 900곡, 바흐가 1200곡, 헨델이 700곡 정도인데 비해 텔레만의 작품 수는 최소 3천곡이 넘는다고 하니 다른 세사람을 합친 것보다 훨씬 많은 작품을 남긴 셈이다. 수백년을 지나면서 텔레만 작품 중 많은 곡이 유실됐고 작품 수에 대한 통계도 음악사가마다 제각각이어서 숫자 자체는 별 의미가 없겠지만 누구보다 많은 작품을 썼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물론 그의 음악활동이 대부분 독일 여러 도시의 교회에 몸담고 있는동안 이뤄졌으므로 그의 작품 가운데 상당수는 성가곡이다. 수많은 찬송 칸타타, 오라토리오를 작곡했는데 그중에서도 12세트의 '칸타타 사이클'(Cantata cycle)과 46개의 '수난곡 오라토리오'(Passion Oratorio)는  텔레만의 교회음악 가운데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잠시 음악용어를 정리하고 가자면, 당시 교회에선 매 주일예배와 특별 절기마다 새로운 찬양 칸타타를 작곡하여 봉헌했는데 1년동안 부르게 되는 한 세트의 찬양곡 모음을 '칸타타 사이클'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한 사이클은 적어도 52곡 이상의 방대한 분량이 되는데, 텔레만은 이런 대작을 12세트나 작곡했다는 것이다. 또 Passion이란 예수의 고난주간과 부활절에 부르는 수난곡을 의미한다. Passion이란 단어가 보통 '열정'을 뜻하지만 여기선 '고난, 수난, 순교'의 뜻으로 쓰인다. 오라토리오는 합창, 독창, 기악연주 등을 혼합한, 수십분에서 수시간에 걸친 방대한 악극형식으로, 거의 오페라에서 배우의 무대연기만 빠진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Passion Oratorio는 예수의 수난에 관한 성경 기록을 오라토리오 형식으로 만든 대작들이다.

근대의 음악 평론가 중 텔레만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텔레만의 이처럼 풍성하고 다양한 교회음악 작품들을 가지고 바흐와 비교하기 좋아한다. 텔레만은 교회음악 작품 숫자만도 바흐의 전체 작품 수에 버금가거나 오히려 상회하는데다 그의 칸타타 사이클이 12개인데 비해 바흐는 5개에 불과하며, 수난곡 수는 46대 4로 완전 텔레만이 우세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왕 바흐가 '음악의 아버지' 자리를 가져 간 것은 어쩔 수 없다손 쳐도 최소한 텔레만에게 '교회음악의 아버지'라는 명칭은 주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교회음악보다도 세속적인 음악이 엄청나게 더 많기 때문에 그를 꼭 교회음악의 대가라고 정의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본다.  그는 하프시코드, 바이올린, 비올라, 플루트, 오보에, 호른, 첼로 등 다양한 악기로 구성된 독주곡, 3중주(Trio), 4중주(Quartet) 협주곡, 소나타, 서곡 또는 전주곡(Overture), 푸가 또는 둔주곡(Fugue), 교향곡과 50여곡에 달하는 오페라까지 수천곡의 세속적 작품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는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 민간행사나 왕실과 귀족들의 각종 연회를 위해 작곡된 실내악 작품도 포함되고 있다.

그래서 일부 음악애호가들은 텔레만을 '식탁음악'의 거장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식탁음악'이란 영어로 Table Music, 독일어로 Tafelmusik(타펠무직)인데 문자 그대로 밥 먹으면서 듣는 음악이다. 때론 배를 타고 식사를 하는 선상파티에서도 연주되었으므로 '수상음악(Water Music, Wassermusik, 바서무직)이라고도 한다. 물론 텔레만이 이러한 행사용의 가벼운 '타펠무직'이나 '바서무직'을 작곡한 것은 맞지만, 사실 그가 만든 이런 종류의 작품은 고작해야 몇개 앨범의 수십곡 정도가 전부이다. 지금도 여러 행사에서 이런 곡이 자주 연주되다 보니 텔레만을 '식탁음악'의 거장이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그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 아주 일부에 불과한 음악장르를 가지고 그의 전부처럼 부르는 것은 뭔가 부족하다.

그럼 도대체 텔레만의 음악은 뭐라 정의해야 옳을까. 그는 워낙 다양하고 많은 작품을 썼기 때문에 음악의 특정 장르를 가지고 그를 정의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된다. 같은 바로크 음악가이지만 악풍이 크게 다른 바흐와 비교해 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 텔레만이 바흐와 극명히 대비되는 점은 작품 수나 작품의 종류 면에서가 아니라 음악에 대한 철학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바흐는 음률이 인간의 청각기관에 어떻게 감동적인 소리를 전달하게 되는지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하면서 작곡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텔레만은 음률이 가지는 여러가지 색채가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파고 드는지, 독일내의 음률 뿐 아니라 프랑스, 이탈리아, 폴란드 등의 다양한 음률을 감성적으로 융화시켜서 당시로서는 상당히 혁신적인 글로벌한 음률을 만들어 낸 작곡가라고 평가하고 싶다.

바흐가 음악의 도(道)와 지고지상의 경지를 추구하는 '음악 도학자'라면 텔레만은 음악의 소비자들, 즉 국내 뿐 아니라 유럽 전역의 음악애호가들이 쉽고 흥겹게 작품을 즐길 수 있기를 바라는 '음악 실학자'였다고 감히 정의하고 싶다. 바흐의 음악은 지금도 웬만큼 숙달된 연주자가 아니면 연주해 내기가 쉽지 않은 음악이라지만 텔레만의 작품에는 10살 내외의 어린이도 쉽게 연주할 수 있는 곡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음악에 대한 철학적 간극은 우리나라 조선시대 말에 유학자와 실학자 사이에 정치적 한판 승부가 벌어졌던 것처럼, 그들의 사후 1800년대초 음악평론가들에게 재평가를 받는 시점에서 두사람의 운명을 완전히 갈라 놓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2. 독일 중북부지역에 바로크 음악의 삼성(三聖)이 태어나다 - 그중 제1은 누구였을까?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작곡가 텔레만, 헨델, 바흐 3인이 독일 중북부의 서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도시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태어난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독일 땅은 당대 음악의 삼성(三聖)을 배출해 낼만큼 터가 좋았던 걸까 아니면 독일의 음악예술적 국운이 하늘에 닿았던 때문일까. 

텔레만은 1681년 3월 14일 독일의 '마그데부르크'(Magdeburg)라는 도시에서 태어난다.  그로부터 4년뒤 1685년에 헨델(2월)과 바흐(3월)가 연이어 태어나는데 이들의 출생지는 각각 '할레'(Halle)와 '아이제나흐'(Eisenach)로 아래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독일 중북부 지역의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모여 있는 도시들이다. 이들 3인은 향후 음악활동 범위도 이 지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텔레만은 라이프치히 등을 거쳐 함부르크에서 활동했고, 헨델은 함부르크와 하노버에서 잠시 일하다가 영국으로 이주했으며, 바흐는 고향 인근의 '바이마르', '쾨텐' 등을 거쳐 평생 라이프치히에서 일하다가 뼈를 묻게 된다.

 

재미있는 것은 텔레만은 4살 연하의 헨델, 바흐 두사람과 모두 친분을 갖고 인간적, 음악적 교류를 한데 반해 동갑이었던 헨델과 바흐는 평생 서로 만나지 못한 가운데 생을 마쳤다는 점이다. 특히 두 사람은 모두 만년에 시력을 잃고 맹인이 되었는데, 비숫한 시기에 테일러경이란 동일한 의사에게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바흐는 1750년, 헨델은 1751년  각각 테일러경의 수술을 받은 후 시력을 완전 상실하게 됐는데, 두 사람이 이처럼 가까운 공간에서 활동했고 텔레만이란 공통 친구를 갖고 있으면서, 가벼운 정보교환도 없이 평생을 지냈다니... 물론 헨델이 서른 되기 전 영국으로 이주하여 바흐와 만날 기회가 적었긴 하지만 가끔 고향에 들렀을 때 바흐가 그를 만나기 위해 찾아 간 적이 있으나 길이 엇갈려 결국 만나지 못했다는 기록을 보면 사람간 만남의 인연이란 참 쉬운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또 한편으로는, 헨델, 바흐 모두와 친분을 나눈 텔레만은 다른 두사람보다 좀더 사교적이고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나 생각되기도 한다. 텔레만의 자서전을 보면 그는 20세가 되면서 어릴 때 쌓아온 음악의 꿈을 접고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라이프치히 대학에 입학하게 되는데, 고향인 마그데부르크에서 라이프치히로 가는 도중 '할레'에 들러 헨델을 만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텔레만은 음악에 재능을 보이긴 했어도 유명세를 탈 정도는 아니었는데 반해, 헨델은 어려서부터 오르간과 하프시코드의 명연주자로 인근에서 꽤 이름을 얻었던 모양이다. 텔레만은 음악을 완전 포기한 상황이었지만 아마도 참새가 방앗간 그냥 지날 수 없 듯이 당시 16세의 동생뻘 아이돌 헨델과 한마디의 음악 이야기도 나누지 않고 할레를 지나칠 수는 없었지 않았나 싶다.

그는 헨델과의 그 날 만남에 대해 "헨델 그 친구 때문에 나는 작곡을 바로 다시 시작할 뻔 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물론 나중에 텔레만은 우연같은 필연의 중첩으로 인해 작곡가의 길로 다시 회귀하여 헨델과 평생 음악친구로 지내게 된다.  헨델은 텔레만의 악보를 연구해 자신의 작품활동에 참고하기도 하고 외국에 멀리 떨어져 지낼 때도 수시로 편지를 써서 안부를 물었으며 텔레만에 대해 "마치 매일 일기를 쓰는 것처럼 쉽게 물 흐르듯 작품을 만들어내는 위대한 작곡가"라고 주변에 늘 칭송의 말을 하곤 했다. 텔레만도 헨델의 오페라 작품을 자신의 무대에 올리기도 하고 작곡공부나 취미생활도 함께 하는 등 친분을 유지했다. 그래서 그런지 헨델의 음악은 굳이 따지자면 바흐보다는 텔레만에 가깝다. '메시아(messiah) 같은 장중한 오라토리오 대작도 있지만 '바서무직' 같이 가벼운 작품을 많이 쓴 점만 봐도 그렇다.

그럼 텔레만과 바흐의 관계는 어땠을까?  텔레만의 자서전은 1740년, 텔레만의 나이 59세 때 쓴 것인데 이상하게도 바흐와의 우정에 관해서는 기록이 전혀 없다. 물론 그의 자서전이 자신의 음악 역정을 아주 간단히 정리한 약식 자서전이어서 헨델에 관한 내용도 몇 줄 밖에 없긴 하지만, 그래도 바흐를 오늘날 '음악의 아버지'가 될 사람으로 봤다면 아마 헨델보다는 한 줄이라도 더 적어 넣지 않았을까? 아마도 당시 텔레만은 바흐를 자신이 돌봐줘야 할 후배 중 한 사람으로 낮춰 봤거나 아니면 그와의 음악 철학이 너무 달라서 음악적 교분을 나눌 수 있는 친구로는 여기지 않았던게 아닐까 상상해 본다.

그러나 텔레만과 바흐의 교류에 관한 다른 기록들을 찾아 보면, 두 사람의 관계는 사실 헨델과의 우정보다 더 깊은 관계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들이 어떻게 만났는지에 관해 자세한 기록은 발견하기 힘들다. 다만, 텔레만이 여러 도시의 교회나 궁정에서의 작곡활동을 거쳐서 1708년 바흐의 고향인 '아이제나흐' 교회의 음악책임자로 자리를 옮겼다는 기록을 보면 아마도 그 때 자연스럽게 바흐와의 친분이 생겼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당시 바흐는 갓 스물을 넘긴 오르가니스트로 매우 불우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조실부모하여 나이 9살에 고아가 된 바흐는 형집에 얹혀 살면서 간신히 오르간 연주 등 음악공부를 마친 후 고향에서 취직이 안되자 인근의 바이마르, 아른슈타트, 뮐하우젠 등 작은 도시를 전전하면서 오르가니스트 일자리를 찾아 얼마씩 머물다 자리를 옮기곤 하던, 요즘 말하면 정규직 자리 하나 없나 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알바생이었는데, 1708년 바이마르에서 간신히 제대로 된 직장을 잡긴 했지만 일찍 결혼한 어린 아내에게 아기까지 생기면서 생활이 여간 팍팍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바흐가 언제 텔레만을 만났는지는 기록이 없지만, 필자는 그들이 이 무렵 만났을 가능성이 높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바흐의 가능성을 알아본 텔레만이 그의 뒤를 봐 주겠다는 마음을 굳힌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텔레만이 1714년 태어난 바흐의 둘째 아들 칼 필립 엠마누엘(Carl Philipp Emmanuel)의 출생세례시 대부를 맡고 그 아기의 가운데 이름자를 자신의 이름인 '필립'(Philipp)으로 지어 줬으며 말년에는 그에게 자신이 봉직했던 함부르크시 음악책임자 자리까지 물려주는 수고를 왜 하게 되는지 해석할 방법이 없다.  텔레만은 1714년에는 '아이제나흐'에서 프랑크푸르트로 옮겨가서 활동하던 시절인데 바흐 둘째 아들의 세례에 일부러 참석해 후견인까지 자임했다는 자체가 텔레만과 바흐의 오랜 친분관계를 설명하는 증거라고 본다. 다만, 이 친분관계는 친구관계라기 보다는 깎듯한 선후배 관계였을 가능성이 높다.

 


3. 텔레만과 바흐의 인생 사후 역전 드라마 - 바흐와 헨델의 잊혀진 친구 텔레만?

이 바로크 음악의 삼성(三聖)들은 바흐(1750년), 헨델(1759년), 텔레만(1767년) 순으로 죽게 되는데, 영국의 국보급 존재가 된 헨델은 비발디처럼 사후에 음악계에서 완전 잊혀지는 불운은 겪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바흐는 몇몇 작곡가의 참고대상이긴 했지만 대중으로부터 완전히 잊혀진 존재가 된다. 그럼 텔레만의 경우는 어땠을까? 그는 당대에 너무 유명했던 여파 때문인지 사후에도 상당히 오랜 기간 후배 음악가 및 평론가로부터 클래식 음악의 모델로 칭송을 받게 된다. 하지만 1800년대 초 신진 음악연구자들이 등장해서 그동안 어둠에 파묻혔던 바흐의 작품을 발굴해 사상 최고의 클래식 음악으로 재평가하는 대신 텔레만의 작품에 대해서는 '가벼운 음악', '대량생산해 낸 복제 음악' 등으로 바흐와 헨델 음악에 비해 '퀄리티'가 낮다고 평가절하를 시작하면서 텔레만 음악은 그 후 2백년간 어둠의 저편에 내던져지는 불운을 겪게 된다. 음악실학자에 대한 음악 도학자들의 반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영국에서 1844년부터 간행된 세계 최장수 음악전문 계간지 The Musical Times의 1950년 4월호, 텔레만이 사후 수백년 후 처음 다시 주목받기 시작할 당시 바흐와 헨델과의 친분을 중심으로 텔레만의 음악을 소개한 기사임)

 

영국의 음악 전문 계간지 The Musical Times지 1950년 4월호는 텔레만의 음악세계를 소개하면서 그가 바흐와 헨델의 잊혀진 친구였다고 제목을 달고 있다. 이 당시는 음악애호가들도 텔레만에 대해 거의 무지한 상태였을 것이다. 텔레만 작품은 1900년대 전반부터 서서히 다시 연구가 되기 시작했지만 본격적으로 연주가 되고 음반이 출판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이후이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1900년대 전반기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텔레만에 대해 기록할 자료가 없어서 단지 독일 작곡가로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다는 한두줄의 내용 밖에 싣지 못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니 The Musical Times 기자가 당시의 무명 작곡가 텔레만의 소개기사를 살리기 위해 그가 바흐와 헨델의 잊혀진 친구였음을 강조하는 제목을 달았다는 것은 이해가 가면서도 참으로 쓴 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는 대목이다.

 


4. 텔레만은 악기 연주와 작곡을 모두 혼자 깨우친 신동이었나?

그러면 텔레만의 어린 시절부터 그의 삶과 음악을 좀더 들여다 보기로 한다. 이미 300여전년이다 보니 이 시대 작곡가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거의 전설에 가까와져서 온갖 소설적 내용들이 난무하는데, 텔레만의 경우는 자서전이 있기 때문에 좀더 정확한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자서전 내용이 너무 간단한데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하고 있어서 독자들의 의문을 충족시키기엔 역시 부족한 점이 많다. 기타 문헌들도 참고하여 텔레만의 어린 시절부터 더듬어 본다.

 

(Johann Mattheson이 1740년 간행한 바로크 작곡가 149인의 자서전 모음집, '개선문의 기초, Grundlage einer Ehren-Pforte' 표지와 목차. 목차에 텔레만과 헨델 그리고 출판자이자 작곡가인 자신의 이름 마테존도 보인다)

 

여기서 잠깐 자서전 모음집 출판자인 '요한 마테존'(Johann Mattheson)이란 인물을 살펴보고 넘어가자. 바로크 음악에 관한 자료를 읽다 보면 감초처럼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 '마테존'이다. 마테존은 텔레만과 동갑의 함부르크 출신으로 작곡가, 연주자, 가수, 음악평론가, 외교관 등의 다양한 직업과 영어, 불어, 이태리어 등 멀티 외국어 실력을 갖춘 팔방미인 같은 인물인데 당시 텔레만을 비롯해 바흐, 헨델 등 수많은 음악가들과 친분을 가진 음악계의 마당발이었다. 특히 헨델과 친하게 지냈는데 그 에피소드는 헨델 편에서 다루기로 한다.

이 사람이 근대에 유명해진 것은 음악 때문이 아니라 그가 간행한 음악관련 도서들 때문이다. 그는 '오케스트라 연구', '통주저음 교본' 등 14권의 음악참고서를 집필하고 다국어로 번역했으며 1740년에는  당시 활동했던 독일내 바로크 음악가 149명의 자서전을 모아서 '개선문의 기초'(Grundlage einer Ehren-Pforte)라는 제목의 책을 간행한 것이다. 바로 이 책에 텔레만과 헨델의 자서전이 실려 있다. 아쉬운 것은 바흐가 무슨 이유 때문인지 원고청탁을 거절해서 바흐의 자서전이 빠져 있다는 점이다. 또 이 책에서 마테존은 몇몇 작곡가의 글 말미에 자신의 총평을 간단히 첨언하고 있는데 텔레만의 자서전 끝부분에는 아래와 같은 글을 덧붙여 텔레만을 극찬하고 있다.

(텔레만의 자서전 말미에 '마테존'이 텔레만을 극찬한 글귀)

"륄리는 칭송을 받았고 코렐리는 격찬을 받았지만,
오직 한사람 텔레만은 이 모든 찬사를 초월하고 있다."

여기서
륄리는 Giovanni Battista Lulli (1632-1687, 이탈리아 출신 프랑스 작곡가),
코렐리는 Arcangelo Corelli (1653-1713, 이탈리아 작곡가)로
특히 코렐리는 텔레만 뿐 아니라 바흐, 헨델, 비발디 등
거의 모든 바로크 작곡가들의 음악공부 모델이었다.


***

 

텔레만은 개신교회의 성직자인 아버지와 역시 교역자 집안의 딸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이들은 모두 음악과 전혀 관련이 없었다고 한다. 다만, 굳이 음악적 계보를 찾는다면, 어머니의 조카가 어느 교회의 성가대 지휘자였다는 것과 아버지의 할아버지 그러니까 텔레만의 증조부가 1500년대 후반에 직업 음악인이었다는 정도가 고작이다. 더구나 텔레만의 아버지는 39살의 나이로 일찍 작고하는데 당시 4살이었던 텔레만을 비롯해 여러 아이들을 홀로 키우게 된 텔레만의 어머니는 당연히 아들을 돈벌이도 신통치 않은 작곡가로 키울 생각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텔레만이 독일 바로크 작곡가로 우뚝 설만큼 음악적 역량을 발휘하게 된 것은 어찌된 일일까.

그가 어린 시절 음악을 어떻게 배우고 익힐 수 있었는지 자서전에도 자세한 기록은 없고, 단지 어린 텔레만이 천재나 신동이었다면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정도의 대단한 음악적 활약만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는 "초등학교 때 음표가 뭔지도 모르던 시절, 바이올린, 풀루트, 치터(거문고 같은 현악기) 등을 연주하여 친구들을 즐겁게 해 줬으며, 10살 때 '김나지움(중고교 과정)'에 들어가서는 음악 선생님이 뭔가 작곡하느라고 수업진행을 한두주일 텔레만에게 맡겼는데 이 때 음악에 관해 엄청난 공부를 할 수 있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무언가 가르치기 위해 공부를 많이 했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선생님에게 배웠다는게 아니라 결국은 스스로 깨우쳤다는 것이다.

또 텔레만은 그 당시 선생님이 작곡한 곡의 악보를 슬쩍 엿볼 수 있었는데 "그 때마다 나는 너무 기뻤다. 왠지는 모르지만, 그의 악보를 보면 무지 흥분이 되었다. 여러가지 선율이 머리에 떠올라서 내 나름대로 곡을 만들어 보려고 악보도 그려보고 열심히 공부하면서 점점 음악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게 되었고 - 진정으로 솔직하게 말하는건데 - 결국은 내 스스로 작곡을 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쓰고있다. 그 후 텔레만은 자기가 만든 곡의 악보를 익명으로 교회나 음악당의 지휘자 손에 들어 가게끔 만들어 여기 저기서 자신의 곡이 연주되는 것을 듣게 된다. 텔레만은 한동안 이처럼 숨어서 작곡활동을 하다보니 어느정도 배짱이 생겨서 12살이 되자 'Sigismundus (지기스문투스)'라는 제목의 오페라를 작곡하여 무대에 올리고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노래까지 부른다.

 

그는 자신의 이같은 천부적 재능을 보완 설명하려는 의도인지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덧붙이고 있다. "나는 이러한 음악적 재능을 갖게 되기 전에 먼저 건반악기를 배워야만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처음 고용한 과외선생은 자신의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딱딱하고 격식에 치우친 '기호식 악보 표기법'을 강요하여 나를 공포에 몰아 넣었다. 내 머리 속에서는 온갖 재미있는 선율들이 떠오르고 있는데 이런 고문을 견뎌야 하다니... 나는 두주일 후 결국 과외를 그만 두었고 다시는 음악선생을 초빙하여 음악을 따로 배운 적이 없다." 그는 나중에 건반악기는 물론, 바이올린, 비올라, 오보에, 플루트, 트롬본 등 각종 악기를 거의 모두 독학으로 배워서 깨우치게 되니, 그는 작곡가일 뿐 아니라 multi-instrumentalist (두개 이상의 악기를 직업적으로 다루는 음악가)라는 타이틀로도 불리게 된다.


텔레만은 젊은 시절 자신의 작곡공부를 위해 당시 유럽 음악계에서 유명했던 스테파니 (Steffani, 이탈리아), 로젠뮐러 (Rosenmüller, 독일), 코렐리 (Corelli,이탈리아),  칼다라 (Caldara, 이탈리아) 등을 모델 작곡가로 선정해서 그들의 작곡기법과 예술성을 열심히 공부했다고 말한다. "나는 하루라도 오선지에 음표를 채워 넣지 않고 그냥 보낸 날이 없다."고 자신의 열정과 근면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가 아무리 천재였다 해도 그만큼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텔레만이 태어난 도시, 마그데부르크)


5. 결코 음악의 길을 벗어날 수 없었던 운명의 '풍각쟁이' 소년 텔레만

텔레만의 어머니가 아들을 돈 많이 버는 다른 직업인으로 키울 생각이었다 해도 어릴 때 음악 과외선생을 붙여 주기도 한 것을 보면 원래 음악을 절대 반대한 것은 아닌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12살 때의 오페라 공연 때문에 주변의 음악 혐오자들이 어머니에게 찾아가 "저 아이를 그대로 뒀다간 풍각쟁이에 딴따라가 될게 틀림없으니 아예 초장부터 음악을 못하게 하라"고 들쑤시는 바람에 어머니도 음악에 반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는 텔레만을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첼러펠트(Zellerfeld)로 전학까지 시켜서 음악과의 인연을 완전히 끊어버리겠다는 시도를 하지만.....

음악의 신은 새로 전학간 학교에서 조용히 공부만 하던 텔레만을 결코 그대로 두지 않았다. 광부들이 많이 사는 이 마을에 축제일이 다가오는데 음악 지휘자가 갑자기 병이 들었고 텔레만의 작곡 재능을 알고 있는 친구 하나가 텔레만을 대리 지휘자로 추천하면서 졸지에 교회 음악단의 지휘를 맡게 된다. 텔레만은 "키가 작아서 단을 쌓고 올라가 지휘를 했는데, 가수나 악기가 많지는 않았지만 소리가 좋았다. 축제 후에 광부들은 음악보다도 내 작은 키에 감동하여 나를 무동 태우고 온 마을을 다니며 꼬마 작곡가를 격려해 주었다"라고 당시의 감동을 회상하고 있다.

이 축제 이후 라틴어 선생이었던 텔레만의 담임교사는 텔레만을 불러 그의 음악을 칭찬하면서 작곡과 지휘 활동을 계속해 보는게 어떠냐고 제의한다. 그는 음악과 기하학에도 일가견이 있는 사람으로 텔레만을 설득하기 위해 이 두개의 학문이 서로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 설명하기도 했다. 음악을 일반 학문과 병행할 수 있다는 근거를 제시한 것이다. 이에 고무된 텔레만은 과외로 음악활동을 계속하게 된다. '통주저음'에 관한 책이 많이 나와 있는 것을 모르고 '통주저음'을 공부하기 위해 나름대로 발견한 음률의 법칙을 일일이 노트하면서 작곡공부를 계속했고, 매주 주일예배를 위해 칸타타를 한곡씩 썼으며 특별행사가 있을 때마다 시 관현악단과 합창단을 위한 모테트(Motet, 무반주 성악곡)와 교향곡을 작곡했다. 여러가지 악기 연주법을 익히는데도 열심이었고 일반 과목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아 나중에는 학업성적이 전체 150명 학생중 3등을 차지했다.

 

그런데 텔레만은 1701년 대학 입학을 앞두고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다. 이제 음악은 어느정도 해 봤으니 어머니가 원하는 '왕실법률자문' (privy councilor, Geheimrat)이 되기 위해 법학을 공부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힌다. 텔레만은 상당히 효자였던 모양이다. 일부 자료에는 어머니의 강압에 의해 법률공부를 하게 됐다고 나오지만 자서전에선 분명히 자신의 의지로 음악 포기를 결심했다고 쓰고 있는 것이다. 그는 정들었던 악기와 악보를 과감히 모두 떨쳐버리고 라이프치히로 향한다. 이미 언급한대로 가는 길에 할레에 들러 헨델을 만나 친구가 되는데 그와의 만남에서 받게 된 음악에 대한 강한 유혹도 뿌리쳐 버린 것을 보면 그의 결심이 매우 굳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때 음악의 신이 텔레만을 그대로 내버려 뒀다면 오늘날의 음악가 텔레만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한창 법률공부에 매진하고 있을 즈음, 그의 기숙사 룸메이트가 텔레만의 옷가방에 새겨진 찬송가의 악보를 발견하고 무엇인지 물었다. 텔레만은 자신의 어린 시절 작곡활동을 이야기해 주고 그 당시 자신이 만든 곡이라고 했더니 그 곡을 다음 주 '성 토마스' 교회에서 연주할 수 있도록 빌려달라는 것이다. 그걸로 끝인가 했는데, 그 곡의 연주가 있은 후 '로마누스' 라이프치히 시장과 왕실법률자문이 텔레만을 불러 그의 곡을 칭찬하면서 더도 덜도 말고 두주일에 한 곡씩만 이같은 성가곡을 써 주면 상당한 보수를 주겠노라고 제의를 해 왔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가 다음달 생활비를 보내왔을 때, 텔레만은 최종 결심을 하고 생활비를 모두 돌려보낸다. 그리고 자신의 현재 입장을 자세히 설명하면서 앞으로 자신의 음악활동에 대한 반대를 거둬 달라고 간청하는 편지를 쓴다.  이에 대해 어머니는 의외로 쉽게 승락했으며 그의 새로운 노력을 축복했다고 한다. 학비를 벌 수 있는 정도라면 음악을 병행해도 좋다는 의미였을까. 아니면 음악을 그렇게 좋아하는 아들의 뜻을 존중해 준 것일까. 아무튼 텔레만은 이렇게 해서 다시 작곡활동을 시작하는 계기를 만들게 되는데, 돌이켜 보면 아마도 텔레만은 음악을 떠나 있을 때도 무의식중에 언제든지 음악의 길에 다시 걸려들 수 있도록 낚시바늘을 만들어 음악계 쪽으로 비쭉 내밀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하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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