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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디' 상편에서 이어집니다.

 

 

5. Virtuoso 비발디 - 베끼는 속도보다 작곡하는 속도가 빠르다?

비발디는 삐에따 보육원 바이올린 교수로 들어간 후 처음엔 원생들에게 음악 이론과 악기 사용법을 가르치는 정도였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작곡과 연주회 관리 등의 비중있는 업무가 추가로 주어지면서 연봉과 직위도 계속 올라가 1716년에는 연주감독(Maestro de Concerti)이 된다. 각종 오라토리오, 칸타타 등 성가곡은 물론이고 협주곡, 독주곡 등 수많은 기악곡을 작곡하여 악보를 출판하고 끊임없이 무대에 올림으로써 바이올린 연주자에서 점차 작곡가로서의 새로운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비발디의 평생직장이었던 보육원의 일자리는 종신직이 아니라 1년 단위의 계약직이었는데 1709년에는 보육원 경영진과의 불화로 인해 이사회의 투표결과 7대 6으로 계약연장이 부결되어 1년간 다른 곳에서 일하기도 했지만, 그의 빈 자리가 컸는지 그 다음 해엔 만장일치로 재초빙됐으며, 그 후 중간중간 베니스와 유럽의 다른 도시를 방문하여 음악활동을 하느라 한동안씩 자리를 비웠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다른 연주감독이 채용된 적이 없을만큼 보육원에서 그의 위치는 매우 확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그 당시 비발디의 연봉에 관한 기록인데, 그의 초봉이 60 두캇(Ducat)으로 아버지 비발디가 성당 바이올린 연주자로 받은 15 두캇에 비해 4배였음은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그의 업무범위 확대와 직위 상승에 따라 2년차에는 100 두캇, 3년차에는 150 두캇으로 엄청나게 급격한 연봉인상이 있었음을 볼 때 보육원 측이 그의 음악적 역량을 얼마나  높이 평가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 그가 외유로 자리를 비운 동안은 한달에 2곡의 콘체르토만 써서 보내주면 되도록 편의를 봐 주었고 한곡당 1 두캇을 지급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Venice Ducat)

당시 유럽엔 두캇(Ducat)이란 이름의 금화가 국별로 주조되어 사용되었었는데 특히 베니스 공화국의 Ducat 금화는 요즘의 달러나 유로처럼 유럽 어디서나 통용되는 기축통화였다고 한다. 직경이 2.2cm에 99.5% 순도의 3.54g 인 1 베니스 두캇을 요즘 금시세로 계산하면 약 17만원쯤 된다. 당시의 물가야 알 수 없지만 150 두캇이라면 매우 큰 금액이었음이 틀림없다. 비발디는 젊은 시절 이렇게 고액연봉을 받았고 악보출판과 공연을 통해서도 상당한 부를 쌓았을텐데 어찌하여 가난한 가운데 죽었다는 것일까.

암튼 비발디는 보육원 업무를 수행하는 중간중간 수많은 신곡들을 쏟아놓게 된다. 그는 부지런하기도 했지만, 아주 짧은 시간에 멋진 곡을 척척 만들어 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특히 그 당시 음악계의 풍조는 한 작품을 만들어 오랫동안 공연하는 것 보다는 한번 공연된 곡은 바로 내리고 얼마나 자주 새로운 작품을 무대에 올릴 수 있느냐를 작곡가의 중요한 능력으로 간주했다고 한다. 당시에 악보는 주로 필사하여 복제를 했는데, 비발디는 종종 필사 전문가가 악보를 베끼는 속도보다 자신의 작곡속도가 빠르다고 자랑했다는 기록도 발견되고 있다. 그래선지 많은 기록들은 비발디 이름 앞에 '비르투오조' (Virtuoso)라는 단어를 붙여서 부르고 있다. "거장", "명인". "달인" 등의 뜻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그의 작품 수가 그렇게 많고 일부 곡들에 중복된 부분이 발견되는 이유가 조금 이해되기도 한다. 

 


6. 비발디 전성기의 악보출판과 판매 - 바이럴 마케팅을 활용했던 비즈니스맨적인 기질

비발디의 작품활동에서 가장 전성기는 1705년에 악보집 Opus 1을 발간한 이후 1729년 Opus 12를 출판하기까지의 약 20년간이라 할 수 있다. 비발디는 이 기간 중 앨범 수록곡 외에도 많은 작곡을 했겠지만 이 출판앨범에는 나름 가장 소중해 하는 작품들을 모아서 수록했을 것이다. 평균 2~3년마다 한 편씩 출판된 12개의 앨범에는 각 편마다 6~12곡씩 모두 114곡이 수록되어 있다. 저 유명한 '사계'는 바로 8집 앨범에 실려 있다.

(비발디의 작품집 목록)

 

비발디는 위 12개 앨범 중 Opus 3부터는 외국의 출판사를 통해 간행함으로써 자신의 곡에 대한 인지도를 국제시장으로 확대해 나간다.  비발디는 특히 수많은 음악전문 잡지와 신문 등을 통해 유럽 전역에 신곡 홍보 능력이 뛰어났던 네덜란드 암스텔담의 출판사를 많이 이용했다. 비발디는 이 세번째 작품집을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음악 스폰서였고 헨델의 후원자이기도 했던 피렌체의 '페르디난도 데 메디치' 대공에게 헌정했는데, "화성의 영감(L'estro Armonico, Harmonic Inspiration)"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 이 제3집 앨범의 6번째 바이올린 협주곡 RV356은 오늘날 '사계' 다음으로 광고음악에 자주 사용되는 음악이다. 또 바흐가 오르간이나 하프시코드용으로 개작한 십수곡 중 6곡이 이 앨범에 들어있다.

이 밖에도 비발디는 외국에서 왕족이나 귀족들이 베니스를 방문하면 그를 환영하기 위해 특별히 작곡했다면서 일부러 찾아가서 헌정곡을 바치는데 열성적이었고, 그의 소문을 듣고 찾아 온 일부 왕족들이 비발디에게 특별 작곡을 의뢰하면 불과 3일만에 뚝딱 명곡을 만들어 줌으로써 고객을 감동시키기도 했다는데 일각에서는 아마도 늘 이런 경우를 대비해 미리 곡을  써 놓는게 아니냐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암튼 비발디의 이러한 행동을 볼 때, 자신의 음악적 재능과 작품들이 입소문과 언론홍보를 통해 유럽전역에 널리 알려지도록 세심한 노력을 기울인 것만은 틀림없다.

실제로 Opus 3은 유럽 각국에서 높은 찬사를 받았고 비발디의 명성은 전 유럽에 퍼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외국의 왕실이나 성당, 음악원 등으로부터 자기네 나라로 와서 공연해 달라는 요청이 쇄도함에 따라. 비발디는 이탈리아의 로마, 브레씨아, 만토바 등을 비롯해 파리, 비엔나, 프라하 등 국제적인 음악도시를 순회 방문하여 짧게는 몇달, 길게는 2~3년씩 체류하면서 왕성한 작곡과 공연활동을 벌이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1725년 '사계'의 '봄'에 감동받은 프랑스 루이 15세의 결혼식에 초청받아 "영광과 혼인"(La Gloria e Himeneo, RV687)이란 제목의 세레나데를 헌정하고, 1728년 여행 도중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칼스 6세에게 연주공연을 선보여 극찬을 받은 후 다음해 간행되는 Opus 9을 황제에게 헌정한데 이어 1730년 황제의 초청으로 비엔나를 방문하고 기사(Knight) 작위와 메달을 수여받게 되는데 아마도 이 시기가 비발디 음악인생의 정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처럼 명성이 하늘을 찌르게 된 비발디는 Opus 12 이후 앨범 출판을 전면 중지했으며 곡을 만드는대로 특정고객에게 개별 판매하는 방법으로 돈을 벌게 된다. 여러 편을 다량 복사해서 싸게 파는 것 보다는 돈많은 부호나 왕실에 독점적으로 판매할 때 수입이 더 높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재미있는 것은 1737년에 비발디의 Opus 13이 간행된 것으로 한동안 알려져 있었는데, 이는 당시 프랑스의 신출내기 작곡가인 니콜라스 쉐데빌(Nicolas Chédeville)이 자신의 작품을 출판사와 공모하여 비발디 이름으로 찍어 낸 위작인 것으로 비발디 사후에 밝혀졌다고 한다. 이렇게 모조품이 나돌만큼 그의 작품 값이 대단했던 것은 확실하다. 앨범 출판활동 초기엔 요즘 말하는 바이럴(입소문) 마케팅으로 홍보전략을 성공시키고 나중엔 대중판매에서 한정판매로 전환하는 등 그의 기발한 마케팅 전략을 보면, 여러 기록에서 비발디가 다분히 비즈니스맨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7. 불후의 명곡 '사계'에 관하여

비발디의 많은 곡 중에 다른건 몰라도 '사계'(The Four Seasons, Le quattro stagioni)에 관해서는 좀더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는게 그에 대한 예의일 것 같다.

(독일 필립스 음반사가 1991년 간행한 비발디 8집 전곡 LP판, 바이올리니스트 Felix Ayo)

 

비발디가 만토바 체류시 주로 작곡한 Opus 8은 "화성과 창작의 경연(Il Cimento dell'Armonia e dell'inventione, The Contest between Harmony and Invention)"이란 대 제목 하에 모두 12곡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수록하고 있는데 그 중 RV269, 315, 293, 297 등 첫 4곡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각각 "봄", "여름", 가을" "겨울"이란 표제를 가지고 있는 바로 그 유명한 '사계'이다. 특히 '봄'의 모티브는 만토바의 어느 교외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 4개의 협주곡은 각각 3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비발디 음악의 화성적 특징인 빠름-느림-빠름(Allegro-Adagio-Allegro)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각 편마다 제목 뿐 아니라 곡의 주제를 14행시 소네트로 해설을 붙인 표제음악의 성격을 취하고 있다. 이 소네트도 비발디가 직접 지었을 것이라는게 음악사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이 소네트의 내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번역자: 아연지). 다음에 사계를 감상할 때는 이 소네트의 내용을 생각하면서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봄)
1악장 : 봄이 우리게 오네. 새들은 축제의 노래로 봄을 맞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은 봄바람에 살그머니 안기우네. 봄의 전령인가 천둥소리가 우르릉 하늘을 검게 뒤덮어도, 우뢰는 곧 적막 속으로 사라져 가고 새들은 다시 즐거운 노래를 지저귄다.
2악장 : 꽃잎 가득찬 풀밭 위로 잎사귀 돋는 나무가지들이 살랑거리면 양떼는 스르르 잠이 들고 충직한 강아지만 곁을 지킨다.
3악장 : 투박한 백파이프의 흥겨운 소리에 이끌려 요정과 목동들이 눈부신 봄의 처마 밑에서 사뿐사뿐 춤을 춘다.

(여름)
1악장: 햇볕으로 후끈거리는 맹렬한 계절, 사람도 양떼도 모두 지쳐버린 후 소나무는 불에 타는 듯. 어디선가 뻐꾸기 소리 들려오고 멧비둘기와 참새의 달콤한 노래가 이어지네. 부드러운 미풍이 공기를 휘젓다 갑자기 사나운 북풍이 한켠에서 몰아치면, 목동들은 호된 폭풍우 만나게 될까 두려워 떠네.
2악장 : 번개와 천둥 무서워 목동은 팔다리 쉴 틈이 없고, 모기와 파리는 주변을 앵앵거리며 광란하네.
3악장 : 아! 목동의 두려움이 현실로. 하늘은 우르릉쾅쾅. 우박은 밀 이삭을 꺾네. 곡식들이 망가져 가네.

(가을)
1악장 : 농부들은 춤추고 노래하며 풍성한 수확의 기쁨을 축하하네. 모두 포도주에 흠뻑 취해 잠에 곯아떨어지면 잔치가 끝난다.
2악장 : 모두들 춤과 노래로, 그리고 환희에 한껏 젖은 분위기로 세상근심을 잊는다. 가을은 많은 사람들을 아주 달콤한 졸음에서 불러내 진정한 즐거움으로 초대한다.
3악장 : 먼동이 트고 사냥꾼들은 일어나 호각과 사냥개와 총을 챙겨 사냥을 떠나네. 짐승들이 달아나고 사냥꾼은 그 발자국을 따라간다. 상처입은 짐승들은 총소리와 개 짖는 소리에 떨리고 지쳐서 엉금엉금 도망치다 붙들려 죽네.

(겨울)
1악장 : 매서운 바람 몰아치는 눈발 속에 오돌오돌 떨면서 발을 동동거린다. 이빨이 따다닥 부딪힌다.
2악장 : 밖엔 비가 퍼 부어도 벽난로 앞에선 평화와 만족의 나날들.
3악장 : 얼음길에 넘어질까 미끌어질까 조심조심 천천히 걷는다. 갑자기 돌아서다 미끌어지고 엉덩방아를 찧고 얼른 일어나 얼음 저편으로 건너가네. 문을 잠그고 봉하고 해도 북풍의 찬기운이 느껴진다. 그래도 나름 기쁨을 가져다 주는 겨울이라네.

비발디는 '사계'에 소네트 해설을 삽입했을 뿐 아니라, 봄 2악장에선 '개짖는 소리', 여름 1악장에선 '더위에 지친 모습', 가을 2악장에선 '술에 곯아떨어진 사람들' 등과 같이 해당 부분에 세부적인 연주 지시사항까지 표기하고 있다.

Opus 8이 출판된 이후 '사계' 중에서도 특히 '봄'은 당시의 사상가이자 작곡가인 '장 자크 루소'가 플루트 독주곡으로 개작하여 발표한 것이 아직 전해지고 있으며 그 외의 여러 작곡가들이 '봄'을 주제로 한 많은 모작들을 만들어 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루소'는 삐에따 보육원에 비발디 음악을 들으러 방문한 적이 있는데, 여자아이들로 구성된 합창단이 당시 관습 상 관중에게 직접 얼굴을 보이지 않고 장막을 가린 채 노래를 부르자 "저 빌어먹을 커튼이 날 슬프게 하네"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우리가 고아한 철학자로만 알았던 '루소'의 괴퍅한 면을 느낄 수 있다.

 

8. 비발디의 오페라 - 새로운 성공과 부, 그러나 올가미가 되다

이쯤되면 독자들은 이 글의 제목이 '오페라에 미친 비발디'인데 도대체 오페라 얘기는 언제 나오는거지 하고 의아해 할 것 같다. 필자는 일부러 비발디의 오페라 관련 부분을 가급적 배제한 채 지금까지 이야기를 이어왔으니 그럴만도 하다. 그 이유는 필자가 보기에 오페라야말로 비발디의 인생 변곡점에 가장 중대한 변수가 되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오페라 이야기를 뒤로 몰아서 독자들의 관심을 증폭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비발디가 오페라를 이처럼 많이 작곡했다는 사실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가운데 필자 같은 아마추어가 그를 오페라에 미친 음악가로 평가하기는 다소 위험부담이 있는게 사실이다.  

비발디의 오페라 곡이 최소한 후세에 확인된 것만도 50곡 정도 되며 그가 쓴 어떤 서한에서 자신의 오페라를 94곡이라고 말한 내용을 인용하면 그 정도로써 비발디를 오페라에 미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걸론 부족하다. 그가 어떻게 오페라에 미쳤는지를 살펴 보기 위해 그의 오페라 역정만을 따로 더듬어 본다. 그가 오페라를 처음 작곡하여 무대에 올린 것은 삐에따 보육원에 자리잡은 지 10년째 되는 1713년이었다. 우리나라 국립오페라단이 2016년 5월 공연한 비발디 오페라 작품은 1714년작으로 그의 두번째 작품인 셈인데 그의 초기 두세 작품은 그다지 대중의 큰 관심을 받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비발디는 그 이듬해 다른 6명의 작곡가를 모아 자신이 선임 작곡가로 이들을 지휘하여 작곡한 11개의 아리아를 포함하는 오페라 "Nerone fatto Cesare(RV724, 악보유실, 1715)"를 발표해 큰 히트를 친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오페라 "Arsilda, regina di Ponto(RV 700, 1716)"을 만들었는데, 그 내용이 주인공 여자가 다른 남장여인을 사랑하는 외설적인 주제라는 이유로 공연심의위원회에서 심의를 받게 되면서 오히려 세간의 관심을 끌기 시작해 결국 그 심의가 통과된 후 이 오페라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리고 같은 해 무대에 올린 "La costanza trionfante and Farnace(RV706)"은 그 후 6번이나 리바이벌 되는 등 그의 생애 가장 성공적인 오페라로 기록되고 있다.

이 때부터 비발디의 오페라에 대한 강한 집착이 시작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확인된 오페라 곡 가운데 그가 가장 왕성한 작곡활동을 벌인 1711년부터 1729년까지 작곡한 오페라가 34곡, 그 이후 1739년까지의 곡이 17곡이다. 그만큼 비발디의 오페라는 그의 전성기에 많이 만들어졌는데 초기에 만든 몇개 오페라 작품이 잇달아 큰 성공을 거두고 외국을 순회하는 동안에도 수많은 오페라 곡을 무대에 올리면서 유럽각국의 귀족들로부터 찬사를 받고 상당한 부를 얻게 된 것이 그의 후반기 음악활동에서 오페라의 깊은 수렁 속에 빠져들게 된 단초가 아니었나 생각되는 것이다.

비교적 순탄했던 이 빨간머리 신부의 음악활동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그가 오페라 작곡에 그치지 않고 오페라 감독에서 다시 오페라 제작자로 손을 뻗으면서부터인 것 같다.  요즈음도 유명 연예인들이 영화제작을 하다가 흥행에 실패해서 전재산을 날리고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특히 연예인 중에서도 한동안 상당한 인기를 누려서 높은 명예와 부를 쌓았던 사람들에게 이런 실패가 많다는 점에서 비발디의 경우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그 당시 베니스와 이탈리아의 오페라 공연업계에는 이미 치열한 경쟁구도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 같다. 비발디가 몇몇 오페라를 성공시켰다고는 하나 오래 전부터 오페라 업계를 좌지우지해 온 다른 작곡가와 제작자들, 지금은 이름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들이지만, 그들에게 치어서 극장의 공연일정 조정이나 연장 등도 맘대로 할 수 없을 만큼 오페라 업계에서 비발디의 영향력은 미미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더구나 비발디는 계속 신부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페라의 주제 선정이나 그의 사생활에도 많은 제약요인이 된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비발디 인생항로에 가장 영향력이 컸던 변수는 그가 만토바를 왕래하면서 음악활동을 하고 '사계'를 작곡하던 무렵, 그의 앞에 갑자기 나타난 여인, '안나 지로(Anna Giro)'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비발디가 오페라에 빠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녀를 만나게 된 것인지 아니면 그녀를 만났기 때문에 오페라에 미치게 된 것인지 그 선후관계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녀의 존재로 인해 벌어지는 이후의 상황은 결코 비발디에게 유리하지 않았던 것은 확실하다. '지로'는 1710년생으로 추정되고 있으니 비발디가 1720년대 초반 그녀를 만났을 때는 여인이라기 보단 열 몇살 정도의 소녀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당시 마흔살을 넘어선 중년의 비발디와 '지로'의 나이 차는 32살로  요즘 신문지상에 종종 오르내리는 홍상수, 김민희와 비해서도 훨씬 큰 셈이다.

 

9. 침몰하는 비발디 - 오페라에 빠졌나 여인에게 빠졌나?

'지로'는 만토바에서 이발사와 가발업을 하던 프랑스계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비발디와 어떻게 조우하게 됐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비발디가 그녀를 제자로 거두어 음악을 가르치는 관계로 시작된 것은 틀림없다. 또한 그녀의 이복언니도 거의 동시에 거두어 자신의 병치레를 돕는 간호일을 맡긴 것으로 전해진다. 아마도 오페라 가수를 꿈꾸던 소녀가 자신을 가르치고 후원해 줄 스승으로 당시 꽤 유명해진 비발디를 스스로 찾아갔거나 누구의 소개를 받은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녀의 언니는 개인일을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던 비발디에게 그녀가 추천했을 것이다.

문제는 당시 세간에서 비발디가 이들 자매를 집안에 들여 함께 살고 있다고 소문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대해 비발디는 "우리집에 동거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이들과의 관계는 음악일과 간호일 뿐이다"라고 전면 부인했으나 이를 그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그 진위에 관해서 후세 사람들도 말이 많다. 그들의 관계에 대해 긍정의 증거도 부정의 증거도 없지만, 일부 기록들은 그들의 염문을 신부와 어린 소녀 간의 연정이 확실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는데 모두 소설일 뿐이다. 그가 파문을 당하거나 하는 일 없이 평생 신부직을 유지했다는 사실은 그의 무죄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아닐까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발디의 음악인생은 서서히 꼬이기 시작한다.

'지로'는 연습생 생활을 마치고 '트레비소'란 작은 도시에서 1723년 오페라 가수로 데뷔했으며 1724년 베니스로 옮겨와 대형 오페라 무대에 선을 보인 후 1726년에는 드디어 비발디가 작곡하고 제작하는 "Dorilla in Tempe"란 오페라에서 비중있는 메조 소프라노로 출연하게 된다. 그 후 '지로'는 수많은 오페라에서 프리마 돈나(Prima Donna) 역할을 맡으면서  비발디와 평생 음악여정을 함께 하게 되는데, 사실 '지로'는 연기력 면에서는 어느정도 인정을 받았지만 가수로서는 그다지 좋은 평을 얻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발디가 '지로'를 끝까지 프리마 돈나의 자리에 붙잡아 두는 것에 대해 세간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비교적 성공적인 무대를 이어오던 비발디 오페라가 1736년부터 급작스런 몰락의 길에 들어설 줄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한번 생각케 되는 대목이다. 이야기는 베니스로부터 남쪽으로 120 km 떨어진 이탈리아의 페라라(Ferrara)라는 도시의 음악 귀족이었던 '벤티보글리오(Bentivoglio)' 후작과의 거래에서 시작된다. '벤티보글리오'는 만돌린을 연주할 줄 아는 젊은 음악애호가이자 귀족으로서 비발디가 로마에 머물 때 안면을 익힌 것으로 알려진다. 1736년부터 1737년까지 비발디와 '벤티보글리오'가 수없이 주고 받은 서한들이 아직 남아 있어서 비발디의 침몰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자세히 전해주고 있다.

1736년 10월부터 시작된 편지글을 종합해 보면, 비발디가 '벤티보글리오' 후작에게 로마에서의 인연을 강조하면서 페라라 시에서 대대적인 오페라 공연 프로젝트 추진을 제의했을 때 처음부터 그다지 호의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벤티보글리오'의 첫 답신은 비발디의 제의를 반갑게 수락했다기보다는 단지 "페라라 시의 오페라 감독인 '볼라니(Bollani)'를 베니스로 보내서 귀하가 제의한 오페라 프로젝트를 협의토록 하겠다"는 지극히 사무적인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오페라 프로젝트의 시작은 그런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다. 비발디가 이미 작곡한 2곡의 오페라 곡과 대본를 저렴한 비용에 각색하여 제공하되 비발디 자신이 감독을 맞고 프리마 돈나에 '지로'를 캐스팅하는 방향으로 논의가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736년 12월 갑자기 무슨 이유에선지 페라라 시 오페라 감독 '볼라니'로부터 태클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공연할 곡과 대본의 각색과 필사작업이 거의 마무리되어 가는 시점에 느닷없이 한 곡을 다른 작품으로 바꾸자고 요구하더니 얼마 안 있어 나머지 한 곡마저 다른 작품으로 교체해 줄 것을 요청해 온 것이다.  이는 악보의 필사와 배우들의 연습에 이미 들어간 많은 비용의 손실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청이었다. 하지만 을의 입장에 있는 비발디로서는 공연작품 변경요청 자체를 거절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볼라니'에게 손실의 보상을 요구하는 한편 '벤티보글리오'에게도 편지를 써서 '볼라니'의 횡포스런 태도를 알리고 보상이 이뤄지도록 도와주기를 바랬으나 돌아온 답변은 매우 냉랭했다고 한다.

암튼 해를 넘겨 이 오페라 프로젝트는 계속 늘어지게 되었는데 다행히 1737년 5월 베로나(Verona) 시에서 공연한 오페라 'Catone in Utica'가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 재정적으로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벤티보글리오' 후작이 본인의 갑작스런 외유 일정을 이유로 가을시즌의 공연이 불가능하니 공연을 무기한 연기하라고 주문한다. 아마 그동안 억눌러 왔던 비발디의 재정위기는 이때부터 터지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볼라니'와 '벤티보글리오'가 합세하여 비발디 프로젝트를 대놓고 방해한 이유도 미스터리지만 비발디가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페라라 시의 오페라 공연에 끝까지 매달린 이유도 이해하기 힘들다.

이 해 11월에 다시 시작된 편지를 보면,  '벤티보글리오' 후작은 오페라 공연 시기를 다음해 1~2월의 카니발 시즌으로 하되 예정대로 비발디가 감독을 맡도록 동의한다고 말하고 있어 이제야말로 모든 문제가 끝나는가 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정타는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갑자기 페라라의 추기경 '루포(Ruffo)'가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성직자로서 미사집전을 거부하고 가수와의 염문을 뿌리는 비발디는 페라라 시에 출입할 수 없다고 금족령을 내리고, 마찬가지 이유로 '지로' 자매도 환영할 수 없다고 선포했다. 비발디에겐 청천벽력이었을게다.

이에 대해 비발디는 '벤티보글리오' 후작에게 다음같은 서한을 보내 추기경의 칙령을 반박한다. "이번 오페라는 내가 없으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또한 '안나 지로'를 대체할 다른 가수도 없습니다. 그녀만한 프리마 돈나를 찾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14년동안 세계 각국을 순회하며 공연을 같이한 동지입니다. '루포' 추기경이 세상으로부터 아무런 베품도 받지 못한 이 가련한 여인들을 모욕한 것은 심히 유감스런 일입니다. 우리는 로마 교황의 관저에서도 두차례나 공연했을 정도로 세계 어디에서도 출입을 제지당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병으로 미사집전을 할 수 없는 것이지 거부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몸이 약해서 집 밖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마차나 탈 것이 있어야 할 뿐 아니라 4~5명이 주변에서 시중을 들어 주어야 합니다. 이 여인들은 나에게 꼭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이 편지는 결코 대세를 바꾸지 못했으나 비발디의 병약한 페미니스트적인 절절한 심정을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0. 초라하고 쓸쓸한 죽음 - 그러나 소년 하이든의 배웅을 받다.

결국 페라라의 오페라 프로젝트는 무산되었고 비발디는 심한 재정위기에 몰리게 된다. 위 스토리는 추기경과 '벤티보글리오' 후작과 '볼라니' 감독 3인이 미리 각본을 짜고 차례로 치고 빠지면서 비발디 죽이기를 모의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절묘한 감이 있다. 비발디가 알지 못하는 어떤 거대한 세력의 음모에 걸려든 것은 아닐까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마저 든다. 암튼 비발디의 이 예상치 못한 불운은 결국 로마에서 '벤티보글리오' 후작을 만난 사소한 사건에서 비롯됐다 할 수 있는데 이처럼 사람과의 우연한 만남이 가져올 수 있는 엄청난 파장을 누군들 미리 예측할 수 있으랴. 그래서 우리는 다만 기도할 뿐이라.

이 때 비발디의 나이는 이미 60세. 그 후에도 몇곡의 오페라 작품을 쓰고 작품활동을 하긴 했으나 페라라 사건의 재정적, 심적 후유증이 너무 큰 탓이었을까 아니면 병약한 몸으로 나이들어 활력을 잃은 것일까, 베니스 등 그의 활동영역에서 비발디 음악에 대한 인기가 급작히 시들어 버린다. 많은 문헌에서 당시 음악계가 그의 음악을 시대감각에 뒤처진 낡은 음악으로 치부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1700년대초 바로크 시대가 그토록 음악취향이 급변하는 시대였을까. 이에 관해서는 끝에서 좀더 살펴 보기로 한다.

비발디는 모든 재산과 인기를 잃어버린 상황에서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을 것이다. 1740년, 남아있는 악보를 팔아서 여행비를 마련한 비발디는 '지로'와 함께 비엔나로 간다. 그래도 한창 시절 자신의 음악세계를 극찬해 준 비엔나의 칼스 6세가 가장 먼저 떠올랐고 그에게 가면 궁정에서 일하면서 오페라를 무대에 올릴 수도 있으리라는 한가닥 꿈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끝내 비발디 편이 아니었다. 그 해 10월 칼스 6세는 그에게 별다른 음악활동의 안배를 해주지도 못한 채 급사하고 만 것이다. 더구나 비엔나에 내전이 일어나면서 칼스 6세의 딸로 그의 후원자가 될 수도 있었던, 나중에는 황제의 자리까지 오르게 되는 '마리아 테레사'가 헝가리로 일시 피신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고 정국혼란으로 모든 공연장은 1년간 문을 닫게 되었으니 비발디에겐 더이상 버틸 한줌의 기운조차 남지 않았을 것이다.

비발디는 그의 나이 63세, 1741년 7월 17일과 18일 사이의 밤에 비엔나의 어느 월셋집에서 천식인가 감염인가로 숨을 거두게 되며, 그의 장례식은 '성 스테판' 성당 - 나중에 모짜르트가 결혼식과 장례식을 치르게 되는 바로 그 성당 - 에서 치러졌는데 이상하게 장례를 위한 음악연주가 전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나중에 '교향곡의 아버지'라 불리게 되는 당시  '성 스테판' 성당 합창단 소속의 9살 소년 '하이든'은 장례식에 참석했지만 진혼곡을 부를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 정확한 이유는 전해지지 않지만, 아마도 고액의 비용을 지불해야 했던 합창단 연주가 막판에 취소된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비발디의 쓸쓸한 마지막을 우연찮게 하이든이 배웅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전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비발디는 비엔나 '칼스플라츠(Karlsplatz)' 근처의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건물이 들어서면서 이장되어 지금은 유골이 어디에 안장되어 있는지 모른다. 당시 유럽 음악계를 풍미했던 Virtuoso Vivaldi의 마지막 치곤 너무 초라한 결말이었다.

 

11. 후기 - 잊혀진 비발디의 부활

그의 초라했던 죽음만큼이나 그의 음악은 대중에게 완전히 잊혀진다. 그의 사후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거의 200년간 그의 음악을 거론하는 사람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악보는 도서관이나 개인의 서가에서 잠들고 있었고 많은 악보들이 무관심 속에 버려졌을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이는 그 당시의 급변하는 시대적 상황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 바로크 음악에서 고전주의로 넘어가는 1700년대 중반의 시기는 1,000년 이상 지속된 천주교의 유럽사회 지배가 끝남으로써 과거의 것은 무조건 낡고 배척해야 할 것으로 치부되기 시작한, 어떻게 보면 새로운 세상을 향한 과거 이념과의 절대적 단절만이 지상의 가치인양 대중의식이 급격히 변화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음악계에 있어서도 작품의 개별적인 호불호가 아니라 이전 시대의 작곡가는 무조건 잊혀져야만 할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도 그의 사후 비발디처럼 완전히 잊혀진 작곡가였다는 사실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다만, 1750년 사망한 바흐는 비발디보다 조금 빨리 부활한다. 1802년 독일의 어느 음악 학자가 낭만주의 이전의 음악을 연구하면서 바흐 작품을 다시 출판하고 연주하기 시작한데서 발단이 되어 바흐의 작품은 이미 낭만주의 시대부터 많은 작곡가의 연구모델로 부상하게 된다. 이들은 '바흐'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바흐'가 개작한 몇곡의 비발디 작품을 발견하게 되지만 그 때만해도 그저그런 2류 작곡가로 무시하고 지나친다. 사실 바로크 시대에 바흐와 비발디 중 누가 더 유명한 작곡가였냐고 하면 단연 비발디가 우세하다. 당대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못했던 바흐가 이처럼 우연한 계기로 재발견되어 음악의 아버지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쉽게도 비발디 음악은 바흐와 같은 행운을 만나지 못한 채 20세기초까지 어둠에 묻혀 있다가 역시 우연한 기회에 그 생명력을 세상에 드러내게 된다. '프리츠 크라이슬러(Fritz Kreisler, 1875~1962)라는 오스트리아 출신 바이올린 연주자 겸 작곡가가 1900년대 초반부터 꽤 명성을 쌓기 시작했는데 그는 특히 잊혀진 옛날 작곡가들의 곡을 발굴해서 연주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미국에서 주로 활동한 그는 비발디 등의 잊혀진 작품이라면서 멋진 곡들을 연주하여 대단한 인기를 끌게 되었다고 한다.

1935년 크라이슬러의 60세 생일에 뉴욕타임즈 음악기자가 생일축하 전보를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조크를 했다고 한다. "혹시 당신을 유명하게 만든 비발디  작품이라는 음악들도 직접 작곡하신 건 아니겠죠?" 이에 대해 크라이슬러는 "사실은 제가 작곡한게 맞습니다."라고 느닷없는 커밍아웃을 해서 음악계를 발칵 뒤집어놓게 된다. 당시엔 그를 사기꾼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누가 작곡했든 그의 바이올린 연주에 우리 매료됐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면서 옹호하는 사람도 많았다. 1927년 당시 비발디 작품으로 출판되었던 그의 바이올린 연주작품은 "Concerto in C major in the style of Vivaldi"라는 이름으로 아직 우리 곁에 남아 세계의 명연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런 해프닝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이 무렵부터 비발디의 이름이 서서히 관심을 모으기 시작한다. 1926년 이탈리아의 수도원과 귀족후손들의 서고에서 다량의 비발디 작품들이 발견되면서 음악계의 화제를 모았고, 1939년 비발디 기념사업을 시작한 이탈리아 작곡가 '알프레도 카셀라(Alfredo Casella)'는 그동안 파묻혀 있던 비발디 작품의 발굴 및 연구활동을 체계적으로 벌임으로써 비발디 음악을 세상에 다시 부활시킨다. 그러나 그의 음악이 본격적으로 연주되면서 세간의 인기를 다시 회복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라고 하니 같은 시대를 살았던 '바흐'에 비하면 150년이나 늦어진 셈이다. 이렇게 오랜 기간 잊혀져 있다보니 그의 많은 작품은 아직 행방불명인 것이 많고 요즘도 간간이 비발디의 협주곡이나 오페라 곡이 새로 발견되었다는 기사는 음악신문의 중요한 뉴스거리가 되고 있다.

그럼, 비발디의 인생 항로를 바꾼 주인공 가운데 한 사람인 '안나 지로'는 그 뒤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는 비발디 사후 비엔나에서 베니스로 돌아와 오페라 가수를 계속했으며 1748년 어느 돌싱 귀족과 결혼하면서 음악계를 은퇴했다는 정도 밖엔 기록이 없다. 그냥 평온한 삶을 살고 간 모양이다. 그녀는 비발디에게 몰아쳤던 풍랑과도 같은 세월이 조금은 자신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며 살다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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