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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로 유명한 '비발디'(Antonio Lucio Vivaldi). 그는 지금부터 300여년전 어떤 삶을 살다 갔을까. 오늘날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The Four Seasons, Le Quattro Stagioni)'만큼 우리에게 익숙한 고전음악도 없을 것이다. 비발디의 '사계'는 언제부터인가 한국인의 고전음악 선호도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다양한 상업광고에 배경음악으로 쓰이고 있다. 구글에서 '비발디'를 검색하면 '비발디 파크' 같은 회사이름이 먼저 나올만큼 대중화된 이름이기도 하다. 그래서 무척 친숙한 듯 한데 실제로는 아는게 별로 많지 않은 그의 삶과 음악을 정리해 본다.

 

(비발디, 1678~1741)

 

1. 다작 작곡가 비발디의 음악에 대한 다양한 평가

비발디는 '사계'외에 알려진 곡이 거의 없다 보니, 작품을 그다지 많이 쓰지 못한 작곡가로 생각하기 쉬우나 사실은 비발디만큼 다작한 작곡가도 드물다. 천주교 신부의 신분이었던 만큼 수많은 오라토리오, 칸타타 등 성악곡이나 찬양곡을 작곡한 것은 물론이고, 그외에 바이올린, 비올라, 만돌린, 첼로, 플루트, 오보에, 바순, 레코더 등 다양한 관현악기의 독주곡, 협주곡, 소나타, 신포니아 등 기악곡만도 500여곡에 이른다. 또한 그 시대에 오페라가 서서히 붐을 맞기 시작하긴 했지만 그가 만든 오페라곡이 무려 94곡이나 된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100년후의 베르디가 평생 34곡의 오페라를 쓴데 비하면 대단히 많은 셈이다. 비발디의 작품이 모두 700곡이라는 기록도 있고 900곡이 넘는다는 설도 있어 정확친 않지만, 아무튼 다양하고도 많은 곡을 쓴 것만은 틀림없다.

필자가 비발디 음악에 관해 정리하면서 얼핏 느낀 점은 그가 몸은 바로크 시대를 살다 갔지만 창작정신 측면에서는 거의 백년정도를 앞서서 낭만주의를 추구했던 선구자가 아니었나 하는 것이다. 누구도 이런 평가를 내린 적이 없어서 조심스럽긴 하지만, 비발디가 자신의 사후 백년이나 지난 1800년대의 바그너, 베르디, 푸치니 등 낭만주의 음악가에 의해 열매 맺게 되는 오페라 작곡에 벌써부터 깊이 빠져 있었는가 하면, 그의 유명한 '사계'에 스스로 지은 소네트(Sonnet, 14행시)  해설을 삽입하는 등, 바로 낭만주의 음악의 특징인 표제음악(Descriptive Music 또는 Program Music)처럼 그의 많은 곡들에는 해설이나 표제가 붙어 있다는 점에서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는 필자의 피상적인 느낌일 뿐이고 사실 음악전문가들의 비발디에 대한 평가는 비교적 스펙트럼이 넓은 편이다. 80년대 뉴욕타임즈가 20명의 현대음악가에게 의뢰하여 역대 클래식 작곡가에 대해 재평가한 내용을 "작곡가를 평한다: 높은 음표와 낮은 음표(Judging Composers : High Notes and Low)"란 제목으로 기사화했는데, 이에 따르면 2명의 음악가가 비발디를 "실제보다 과대평가된(overvaluated) 작곡가"로 분류했다는 것이다.

그중 한 명은  "비발디를 바로크 시대의 대표 작곡가로 운운하는 것은 바흐나 헨델에게 불공평한 일이다. 그의 음악은 실체가 없으며 창의성도 열정도 없다. 귀를 즐겁게 하는 완벽하게 아름다운 음악이긴 하지만 위대한 작곡가라면 갖고 있기 마련인 청중의 마음을 파고드는 무언가가 없다." 라고 혹평하고 있다. 또 한명은 "나는 그의 음악이 싫증난다. 스트라빈스키가 그를 '똑같은 협주곡을 500번 쓴 사람'이라고 했다는데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나는 비발디가 500곡의 작곡을 시작만 했을 뿐 아무런 결말과 성공을 거두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계속 쓰고 또 쓰려고 시도만 했을 뿐이다." 라고 비발디 음악을 패대기 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과대평가된 작곡가' 그룹에는 차이코프스키, 슈베르트, 베토벤까지 포함되고 있는걸 볼 때, 이들의 비발디 혹평은 결코 일반화할 수 없는 편중된 개인 의견에 불과하다고 반박하고 싶다. 더구나, 그의 음악에 창의성도 없고 열정도 없고 청중의 감성을 파고드는 무언가가 없다면 그의 '사계'를 가장 좋아하는 우리나라 음악애호가들은 모두 뭐란 말인가. 물론 비발디의 곡들에 많은 소절과 멜로디가 중복, 재사용된 흔적이 있는 것은 분명하나, 이를 두고 어떤 음악전문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은 늘 새롭게 들린다."라면서, "무엇보다도 음악의 아버지 바흐가 비발디 음악을 높이 평가하여 십수곡의 비발디 작품을 건반악기용으로 개작한 사실은 비발디 음악의 예술성을 뒷받침하는 확실한 증거가 될 것"이라고 비발디를 지지한다.

 

 

이처럼 음악전문가들의 평가도 다양하지만, 가장 이해하기 힘든 미스터리는 그토록 왕성하게 작곡활동을 했던 비발디가 그의 사후에는 대중으로부터 완전히 잊혀짐으로써 그의 많은 작품이 유실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더구나 그는 매우 곤궁한 가운데 생을 마감하여 비엔나의 어느 빈민가 묘지에 묻혔었는데 지금은 실제 유골이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라는 기록을 보면 더욱 그렇다.  94곡이나 되는 의 오페라곡 중 대부분은 사장되었고 부분적으로나마 악보가 전해지는 곡이 20여곡 뿐이라고 한다. 2016년 5월 18일 비발디의 오페라 'Orlando Finto Pazzo(1714년작)'가 한국에서 초연되는 등 전세계적으로 그의 음악이 재조명되고는 있으나, 그렇게 많은 비발디의 작품 중 세계 100대 오페라 한곡도 이름을 못 올리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는 어쩌다가 머나먼 타국에서 가난과 외로움 속에 생을 마친 것도 모자라 오랫동안 잊혀지게 된 것일까.

 

(비발디의 죽음 당시 빈민가 공동묘지였던 비엔나의 1040, Karlplatz 13에는 현재 대학교 건물이 들어서 있으며 그 한 귀퉁이 벽면에 비발디의 묘지석이 붙어 있다. 공동묘지가 철거되면서 다른 곳으로 이장된 것으로 보이나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비발디가 한 때 잠들었던 공동묘지 터에는 "이 곳은 1789년까지 공동묘지 또는 시민병원이었다. 안토니오 비발디는 1678년 3월 4일 베니스에서 태어나 1741년 7월 28일 이곳에 묻혔었었다"고 적힌 묘지석의 내용만이 그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2. 베니스 공화국의 지진 속에 태어난 비발디 -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우다

비발디는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1678년 3월 4일 태어났다. 그 당시 베니스는 이탈리아에 속한 지금의 작은 도시가 아니라 '베니스 공화국'이란 이름의 당당한 독립국가로서, 서기 697년에 성립되어 1797년까지 1,100년간 존속하면서 그 영토가 현재의 그리스, 크로아티아, 터키 등의 지중해변 도시들까지 광범위하게 포함하는, 유럽의 상업, 문화 중심지로 번창했던 한 나라의 수도였다. 아직도 일부 베니스 주민들이 이탈리아로부터의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은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이라는데, 비발디가 이처럼  문화적으로 융성했던 도시에서 태어난 것은 음악가로서 대단한 행운이었다고 볼 수 있다.

비발디가 태어나던 날 베니스에는 큰 지진이 있었다고 한다. 비발디의 출생과 어린 시절에 관해 여러가지 설들이 많아서 혼란스러운데, 여기서는 James Fritz가 저술한 "빨간 머리 신부 - 안토니오 비발디의 일생(The Red Priest - The Life of Antonio Vivaldi, 2013년 Bookcaps 출판)" 등 여러 문헌을 종합해서 좀더 객관적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기록에 따르면, 베니스에 이날 큰 지진이 있었으며, 비발디가 출산 예정일보다 1~2주일 조산되었고, 출산 당시 그의 건강 상태가 몹시도 안 좋았던 것은 확실한 사실로 보인다.

천주교 관습에 따르면 신생아는 회복기간이 어느정도 지난 후 교회에 가서 세례를 받는게 원칙이나 유아가 죽을 위험 중에 있으면 지체없이 세례를 주도록 되어 있는데, 1962년 뒤늦게 발견된 기록에 따르면, 비발디는 태어나자마자 집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그 해 5월 6일 교회에 가서 다시 정식 유아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세례를 두번 받은 셈이다. 비발디가 너무 약하게 태어나 그의 목숨이 바람 앞의 촛불로 보였거나, 지진 때문에 모두 다 죽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거나, 아니면 둘다로 인해 급하게 집에서 세례를 줄 수 밖에 없었던 당시의 긴급상황을 유추할 수 있다. 암튼 비발디는 천행으로 생명을 건지긴 하지만 한평생 병약한 몸으로 살게 된다. 특히 호흡기가 약해서 고질적인 천식을 지병으로 얻게 됐는데, 비발디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가 얼마나 심한 고통을 겪고 있었는지 드러나고 있다. 그는 오래 걷거나 계단을 오르내릴 때에도 숨이 가쁘고 힘들어 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병약했던 비발디가 발군의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게 된 것은 아마도 아버지(Giovanni Battista Vivaldi)덕분임에 틀림없다. 비발디의 아버지는 젊었을 적 이발사(아래 참조)가 직업이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비발디가 어느정도 자라서 그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쳐 줄 당시는 이미 산마르코 성당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연주자로 자리잡고 있었으니, 그는 이발사를 하면서 바이올린을 틈틈이 공부하여 관현악단의 전문 연주자가 될만큼 재능이 뛰어났던 것으로 보여진다. 비발디는 지금도 작곡가이자 훌륭한 바이올리니스트로 불리고 있는데, 천식으로 인해 관악기는 불 수도 없었겠지만 그가 일찌기 바이올린을 통해 음악을 공부하게 된 것은 바이올린 연주자인 아버지에게서 비롯된 아주 자연스런 일이었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바이올린을 잡은 비발디는 아버지를 따라 베니스 내의 교회, 오페라 하우스, 음악원 등을 돌면서 많은 연주회를 가졌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는 연주기교 측면에서 이미 아버지의 수준을 능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706년도에 발간된 베니스 여행안내 책자를 보면, 베니스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명단에 아버지와 함께 비발디의 이름이 나란히 올라 있어 당시 그들 부자의 저명도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비발디는 요즘 말하는 아이돌 연주자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이처럼 아버지와 함께 하는 소년기의 연주여행은 마치 모짜르트의 어린 시절을 연상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발디가 모짜르트와 같은 신동은 아니었다는게 중론이다. 다만 그의 높은 성취는 연습에 연습을 반복한 남다른 노력의 결과였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3. 비발디는 왜 신부가 되었고 누구에게 작곡을 배웠을까.

비발디는 유명한 클래식 작곡가 중 거의 유일하게 성직자의 신분을 가지고 있다. 그는 왜 신부가 되었고 또 성직자의 신분으로 어떻게 그처럼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있었을까. 우선 그가 신부가 된 배경에는 그의 어머니가 죽을 동 살 동 태어난 첫 아들이 목숨을 부지하게 된데 대한 감사표시로 하나님께 그를 바치겠다고 서원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는데 전혀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비발디의 어머니가 그런 서원을 했다손 쳐도 성경에 나오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처럼 끝끝내 그 서원을 지켜서 맏아들 비발디를 성직자로 내놓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그보다는 그의 아버지가 집안의 어려운 생계 때문에 그를 성당에 들여 보냈을 것이라는 설이 더 설득력을 가진다. 성당 바이올린 연주자로 받는 적은 월급으로는 비발디를 포함해 모두 9남매에 달하는 아이들을 키우기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그 당시 종교관습 상 돈 있는 가정에서도 막내 아들 정도는 성직자로 보내는 일이 많아서 대충 남자 20명중에 1명은 성당에 고용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도 집안의 장남을 신부로 만드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따라서 장남이었던 비발디를 굳이 신부로 보낸 것은 고등교육도 무료로 받을 수 있고 사회적 신분도 보장이 되는 성직자로 키워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게 하려는 의도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비발디가 입교하여 사제교육을 받기 시작한 것은 1693년, 그의 나이 15세 때이다. 비발디의 아버지는 아들을 신부로 만들 결심을 했을 무렵, 비발디의 음악적 재능은 그만 덮어버릴 생각이었던 것 같다. 사제교육은 상당히 엄격하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험준한 과정이었으므로 아들이 음악공부를 병행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원래 사제교육은 신학교에 기숙하여 받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상하게도 비발디는 몇몇 성당의 선임 사제 밑에서 견습신부로 출퇴근 하면서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남들보다 훨씬 긴 10년만에야 모든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1703년 신부 서품을 받게 된다. 이 기간 동안 비발디는 공식적인 바이올린 연주 공연을 거의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696년 산마르코 성당의 크리스마스 콘서트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했다는 단 한개의 기록만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비발디는 아마도 이 기간중에 작곡 공부를 열심히 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의 사제교육이 10년이나 걸린 것은 몸이 약해서 그런 이유도 있었겠지만 음악공부에 시간을 뺏긴 탓에 그만큼 교육 진도가 늦어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가 작곡한 첫 공식 발표작품 Opus 1(요즘말로 제1집 앨범)은 1705년의 "12 sonatas for two violins and basso continuo(2개의 바이올린과 통주저음을 위한 12개 소나타)"인데 이는 신부 서품을 받은지 불과 2년 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사제교육 중에 작곡공부를 꾸준히 하지 않았다면 2년만에 작품집을 내놓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가 아버지 생각대로 성직자 교육에만 충실하고 음악공부를 멀리했다면 아마도 지금 우리가 좋아하는 '사계'도 없었을 것이고 56인의 작곡가에 끼는 일은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 베니스에는 음악계를 주도하던 대부같은 존재가 있었는데 바로 산마르코 성당의 음악감독이자 작곡가인 죠반니 레그렌치(Giovanni Legrenzi)로 비발디의 아버지를 바이올린 연주자로 채용한 사람이기도 하다. 많은 기록에서 비발디는 레그렌치로부터 음악이론과 작곡기법을 배웠다고 되어 있고 실제로 비발디가 13세 때 작곡한 짧은 연습곡에서 레그렌치의 특색이 발견되고 있기는 하나 레그렌치가 죽었을 때 비발디의 나이가 12살이었음을 감안하면 그의 영향력이 그다지 크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보다는 비발디의 아버지도 작곡을 했다는 기록을 볼 때 아버지에게 배운 것이 적지 않았을 것이며 그 기초 위에서 엄청난 연습을 통해 스스로 작곡기량을 개발했을 거라는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4. 미사집전에서 열외된 신부 - 보육원에서 음악의 날개를 펴다

1703년, 나이 25세에 신부가 된 비발디는 그 해에 '오스뻬달레 델라 삐에따(Ospedale della Pietà)'라는 이름의 여자 보육원에 바이올린 교수로 채용되어 그후 36년간 봉직하면서 보육원의 음악관련 최고 책임자가 된다. 따라서 비발디의 작품활동은 사실 이 보육원에서 시작하여 보육원에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당시 보육원은 사실 말만 보육원이지 요즘의 우리나라 소규모 고아원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선 인원이 1천명을 넘는 대규모인데다 각종 고등교육 수준의 학문을 가르치고, 병원시설을 가지고,  막강한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운영하는 오늘날 중고교 및 대학교 같은 교육기관으로 보는게 합당할 것이다. 이 보육원은 고아들이 성년이 되어도 음악 등에 재능있는 경우는 계속  남아 있게 했을 뿐 아니라  부유층의 자녀들도 공부하러 일부러 찾아오는 곳이었다. 비발디가 첨부터 이런 곳에서 일하게 된 것은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에 날개를 단 셈이었다.

비록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신부가 되긴 했지만 그의 꿈은 오직 음악이었다. 성직자라면 당연히 본업인 미사를 집전하는 일에 시간과 공을 들여야 했겠으나 첨부터 미사는 그의 관심사항이 아니었다. 물론 그 당시 성직자들이 예배드리는 일 외에 요즘 말하는 투잡으로 과학연구, 미술음악, 정치 등을 하는 것이 매우 일반적이긴 했다. 그러나 비발디처럼 한 1년정도 미사집전을 보조하다가 완전히 미사에서 손을 떼고 음악 관련 일만 한 것은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미사집전이라는게 과격한 운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몸이 약했다고 해도 작곡을 하고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것 보다 힘들었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기록은 그가 병 때문에 신부직무를 수행하기 어려워 미사집전에서 열외되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선임 신부들이 그의 음악에 대한 재능을 높이 사서 어느정도 봐준게 아닌가 생각된다. 아이돌 신부가 들어 왔는데 어떻게 음악을 포기하고 예배만 드리라고 할 수 있었겠는가.

전해지는 재미있는 이야기 중에 비발디가 미사를 드리다 말고 몸이 안 좋다고 뛰쳐나가는 일이 있었는데 사실은 갑자기 떠오른 악상을 노트해 놓기 위해서였다는 말도 있고, 또 어느 선임 신부님이 "이 세상에 하나님보다 높은 것은 없나니" 하니까 "오! 신부님, 저는 하나님보다 높은 곳에 있는 걸 발견했어요. 바로 바이올린 E현의 7 포지션 A음이거든요" 라는 둥 4차원적인 이야기를 해대는 이 병약해 보이는 아이돌 어린신부를 이길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암튼 비발디는 운 좋게도 "저런 싸가지 없는 녀석은 신부될 자격이 없다"고 입에 거품을 무는 일부 고참 신부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성직을 평생 유지하면서 온전히 음악에만 매진할 수 있게 된다. 그가 당시 받은 초봉은 아버지가 받은 연봉의 4배였다고 하니 아버지의 소원도 함께 이룬 셈이다. 그는 아버지의 재능 뿐 아니라 아버지 유전자의 빨간 머리까지 물려 받아 '빨간 머리 신부(The Red Priest, Il Prete Rosso)'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예나 지금이나 빨간머리는 놀림감이 되기 십상이지만  여자 아이들로만 구성된 그 보육원에서는 오죽했으랴.(하편에 계속)
 

 

(참고사항)
1600~1700년대의 이발사는 어떤 일을 했나?

 

 

(Roman Tonsure)

비발디 아버지의 전직이 이발사였다고 하는데 아마도 비발디를 신부로 보내게 된 것과 어느정도 연관이 있지 않나 하는 상상이 된다. 왼쪽 그림처럼 당시 신부들의 머리 모양을 보면 머리 둘레 즉, 주변머리만 남겨놓고 속알머리는 완전히 밀어버리는 스타일(Roman Tonsure라고 함)이었는데 이런 머리를 유지하려면 가장 이발사를 자주 찾게 되는게 신부들이었을 것이다. 비발디의 아버지는 이처럼 신부들의 머리를 깎아 주면서 성직자 직분에 친근감을 느끼고 아들을 신부로 만드는데 앞장서지 않았을까. 

이것도 여담이지만 당시에는 이상한 미신 때문에 이유없이 몸이 아플 경우 피를 조금씩 뽑아 줘야 몸의 독소를 배출하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믿음이 만연해 있었는데 이발사는 머리 깎는 일 말고도 그런 피 빼는 작업과 간단한 외과나 치과치료도 겸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지금도 이발소 앞에 돌아가고 있는 빨갛고 흰색의 원통이 바로 이 당시 이발소를 상징하는 붕대와 피를 의미한다는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더 희한한 사실은 이런 '피 빼는 치료'의 주고객이 귀족들 특히 귀부인들이었으며,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도 이런 치료를 좋아하고 자주 했는데 1799년 그가 사망한 원인은 피 빼는 치료를 하다 일으킨 과다출혈 때문이었다고 한다. 믿기 힘들지만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발소에서 피 뽑는 귀족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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