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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에서

'피아노의 카리스마'

리스트의 작품을 감상한데 이어

오늘은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

(Nicolo Paganini,1782~1840)

'카프리스 24번'을 감상합니다.

이곡은

얼마전 방영했던

드라마 '하이에나'에서

중간 중간

삽입곡으로 나와서

귀에 아주 친숙해졌죠..

 

 

(카프리스란?)

클래식 음악에서

'카프리스'(Caprice)는

우리말로 기상곡(奇想曲)이라고 번역되는데

무슨 뜻일까요.

이탈리아어로

'카프리치오'(Capriccio),

영어로 '카프리스'(Caprice)는

원래

'변덕스런, 즉흥적인' 등의 뜻을

가진 단어로서

클래식에서는

자유로운 형식의 생동감 넘치는

음악 소품을 말합니다.

'카프리스'의 특징은

매우 빠르고

격렬하며

고난도의 기교적 연주가 필요한

작품이라는겁니다.

'카프리스' 형식의 작품은

이미 16세기부터 작곡되기 시작했으나

'파가니니'가

1802년부터 1817년까지 작곡한

24곡의 '카프리스' 만큼

유명한 '기상곡'은 드물죠.

그 이후의

'카프리스'로는

멘델스존의 '브릴리언트 기상곡'

차이코프스키의 '이탈리아 기상곡'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스페인 기상곡'

정도가 이름을 얻고 있을 뿐입니다.

 

('파가니니 카프리스;의 특징)

'파가니니'의

'카프리스' 24곡은

바이올린의 고난도 초절기교 연주기법들을

숙달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연습곡이라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곡인

'카프리스' 가단조 24번

(Caprice A minor No.24)는

1개의 주제에

11가지 형식의 변주를

온갖 고난도의 기법을 동원해

- 빠른 것은 기본이고

몇개 옥타브를 넘나들면서

왼손으로는 현을 뜯기도 하고

현을 이중 삼중으로 눌러야 되거나

화음을 구성하는 여러개 음을

따로 하나씩 연속적으로 연주하는

소위 끊어진 화음이라고 하는

아르페지오 등등을 -

연주해야 하는

세상에서 가장 연주하기 어려운

곡 중의 하나입니다.

***

니콜로 파가니니 (1782~1840)

('파가니니'의 삶과 음악)

'파가니니'는

음악사조가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막 전환되던 무렵

이탈리아 북부 '제노아 공국'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그의 아버지는

부업으로 만돌린 연주를 하기도 했는데

어린 '파가니니'에게

만돌린과 바이올린을 가르친 것이

세기적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의

시작이었습니다.

'파가니니'는

바이올리니스트일 뿐 아니라

훌륭한 기타리스트이기도 한데

이는

그가 어려서부터

만돌린을 배운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파가니니'를 매우 혹독하게

교육시킵니다.

하루 연습할 분량을 못 채우면

밥도 주지 않고

연습을 시켰다고 하네요.

'파가니니'는

이렇게 익힌 바이올린을 들고

일찌감치 이탈리아 북부 지역을

순회하면서 수많은 공연을 통해

일찌감치 소년갑부가 되고

경제적으로 독립합니다.

아버지에게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게 되자

여러 명의

저명한 선생님들에게 레슨을 받고

하루 15시간이 넘는

피나는 연습 끝에

17세 때는

루카 공국 궁정의

제1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기도 합니다.

1801년

그가 19살 되던 해엔

당시 이탈리아 북부를 지배하던

프랑스 '나폴레옹' 황제의 누이

'엘리사 보나파르트'의 궁정에서

일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 곳에 매여서 일하는 것보다는

자유롭게 떠돌아 다니면서

연주회를 가지는 것이

셩격에도 맞고 수입 측면에서도

훨씬 좋았기 때문에

고정직은 다 물리치고

이탈리아 뿐 아니라

유럽 각국으로

연주여행을 다니게 됩니다.

그는

불행하게도

불치의 유전병이 있었는데

팔다리와 손가락 등의

관절이 가늘고 길어지는

그런 병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가 연주하는 모습을 그린

초상화 등을 보면

얼굴과 몸이 바싹 마른 것이

거의 젓가락이 서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의

이러한 병과 길어진 손가락 등으로 인해

오히려

어려운 바이올린 곡을 연주하는데

유리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비주얼 측면에서는

그다지 호감가는 얼굴이나

체형이 아니었습니다.

피아노의 '파가니니'라 불리는

'프란츠 리스트'가

연주회 마다

많은 여성 팬들을 몰고 다닌 것은

어느 정도

'리스트'의 멋진 외모도

한 몫 하지 않았겠느냐

할 수 있지만

'파가니니'의 경우에는

비주얼이 전혀 아닌데도 불구하고

클래식 사상

최초의 오빠부대가

생긴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분석합니다.

당시 사회제도상

억눌려만 살아왔던 여성들에게

'파가니니'의

자유롭고 무형식적이고

파격적이면서 생동감 있는데다

아무나 흉내내기 어려운

초절기교의 바이올린 연주는

충분한

카타르시스와 감정의 분출구가

되었으리라는 겁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바이올린 연주회라고 하면

악보를 앞에 펴 놓고

한 자리에 서서 우아하게

연주하고 마는게 일반적이었는데

'파가니니'는

아예 악보대를 없애고

무대를 활보하면서,

그러니까

요즘 시대의 록 밴드마냥

무대를 휘저으면서

연주했다고 하니

당시 여인네들이 얼마나 환호했을지

조금 상상이 됩니다.

2013년에 개봉된 영화,

'파가니니 -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에선

주인공

'데이비드 가렛'이

너무 잘생겨서

'파가니니'의 원래 모습과는

너무 거리가 있지 않나 생각되죠,

'파가니니' 역의 데이비드 가렛

 

'파가니니'는

그의 지병으로 인한

고통을 덜려고 한 것인지

아편같은 마약이나 도박에 빠졌고

말년에는

심지어 카지노를 차렸다가 폭망하면서

전 재산을 다 날립니다.

하다못해

자신의 생명이랄 수 있는

바이올린까지 경매로 넘기게

됐다고 하네요.

그가 즐겨 사용하던

바이올린은

당대 최고의 악기 장인,

'과르네리'(Guarneri)가 만든 것이었는데

소리가 너무 웅장하고 박력이 있어서

'파가니니'가

'캐논'(Cannon, 대포)이라는

닉네임을 붙여줬다고 합니다.

오늘날은

제노아 박물관에서

보관 전시 중이며

매년 열리는 '파가니니' 콩쿨 수상자들이

이 바이올린으로

연주회를 갖습니다.

파가니니가 쓰던 과르네리 바이올린 - 400만 달러의 보험에 들어 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 바이올린에서는

인간이 기대하기 어려운 소리들이

연주되어

사람들을 경악시켰으며

'파가니니'를

악마에게 영혼을 판 음악가라고

매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1840년

프랑스 '니스'로 여행 중,

내출혈로 사망하게 됩니다.

'제노아' 교회는

'파가니니'의 악마성을 의심하여

그의 시신이

제노아 교회묘지에

묻히는걸 허락치 않습니다.

그의 시신은

방부처리하여 지하실에

보존되다가

30여년이 지난 후에야

제노아 인근의 '파르마'(Parma)에

묻혀 영면하게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보통사람과 다른 삶을

산다는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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