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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캄파넬라, La Campanella)
​전편에서 감상한
'프레데릭 쇼팽'의 야상곡에 이어
오늘은
그의 절친이자 라이벌이었던
'프란츠 리스트' (Franz Liszt, 1811~1886)의
'라 캄파넬라' (La Campanella)를 감상합니다.

 

 

 

 

​ La Campanella는
이탈리아어로
"작은 종' (The Little Bell)을 뜻합니다.
​ 이 피아노 곡은
제목처럼 작고 귀여운 종에서
크고 작은 청량한 맑은 종소리가 쉬지 않고
울려 나오는 듯 들립니다.

그러다보니
피아노 연주자에게는
보통 난이도가 높은 곡이 아닙니다.
일단 곡 전체가
알레그레토로 매우 빠를 뿐 아니라
1~2 옥타브가 넘는 음표 사이를
한 손으로 빠르게 오가면서 연타해야 하는가 하면
4번과 5번 손가락,
즉, 제일 취약한 약지와 새끼 손가락으로
인접한 두개의 음을 연타하는 '트릴' 주법도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원래 이 작품은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불렸던
'니콜로 파가니니'(Niccolo Paganini, 1782~1840)의
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 3악장 론도에서
멜로디를 차용해서
초고난도의 손가락 훈련을 위한 피아노 연습곡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리스트'와 '파가니니')
'파가니니'는
당시
초절기교의 바이올린 주법으로
클래식 음악계 최초로
귀족 여인들을 오빠부대로 몰고 다닌데다
연주법이 기괴할 정도로
난이도가 높다는 점 때문에
인간 한계를 넘어선 연주 테크닉을 얻기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판 음악가라는
의혹까지 받았었는데요.

'리스트'는
이 '파가니니'와 닮은 점이 많습니다.
'파가니니'에 못지 않게
대중적 인기가 높아서
공연장마다 따라 다니는 여인네 팬들이 줄을 섰고
연주 중 기절하는 여인까지 있을 정도였다네요.

 

 

(독일화가 테오도르 호세만 1842년 작, 리스트 연주회, 가운데쯤 실신한 여성이 보인다) 

 


또 피아노의 '파가니니'라 불릴만큼
연주 난이도가 높은 곡을 많이 작곡했습니다.
그가 작곡한 12곡의 '초절기교 연습곡'은
오늘의 감상곡, '라 캄파넬라'와 함께
음악 역사상 가장 연주하기 어려운 피아노 곡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리스트'와 '쇼팽'의 비교)
​'리스트'는 '쇼팽'과도
여러가지 공통분모가 많습니다.

'쇼팽'이 폴란드 출신으로
비엔나를 거쳐 파리에 정착한 것처럼
'리스트'도 헝가리 출신으로
역시 비엔나, 파리, 독일 등 타지에서
활동한 음악가죠.

1811년생인
리스트는 쇼팽보다 한 살 적은 동년배로
어려서부터
여기저기 연주여행을 다니면서
천재성을 뽐낼만큼 음악 신동이었던 것도
쇼팽과 비숫합니다.

물론
모두 피아노라는 악기로 동시대를 휘저은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점도 같은데
두 사람 다
난이도 높은 피아노 연습곡들을
많이 작곡한 점도 동일합니다.

하지만,
음악적 성향 측면에서 두 사람은
완전히 다릅니다.

쇼팽이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릴만큼
시적이고 서정적인 잔잔한 피아노 음악을 추구했다면
리스트는
좋게 말해서 '피아노의 카리스마',
나쁘게 말해서 '피아노의 한량'이라 불릴 정도로
광적이고 쇼맨십이 돋보이면서
오케스트라를 한 대의 피아노로 연주하는 듯한
다이내믹한 음악에 심취했다는 겁니다.


('리스트'의 삶과 음악)
​'리스트'의 아버지, '아담 리스트'는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과도 교류가 있었던
아마추어 음악가였습니다.

'리스트'의 아버지는
'하이든'이 음악장으로 오랫동안 일했던
'에스테르하지' 궁정에서 집사로 근무했었는데
'하이든'을 비롯한 유명인들과
음악회 등에서 자주 어울렸다고 합니다.

'리스트'가 태어난 것은
'하이든'이 죽은지 2년이 지난 후였으므로
당대의 최고 음악가를
직접 대면할 기회는 없었지만
이미 태중에서부터
늘 클래식 음악을 듣고 자라서 그런지
일찌감치 천재 음악가의 기질을 드러냅니다.

아버지는
8살짜리 아들의
천재성을 살려 주기 위해
당시 비엔나에 살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카를 체르니' (Carl Czerny, 1791~1857)에게
데려 갑니다.

오늘날도 피아노 배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교과서로 사용하는
바로 그 체르니 교본의 저자인 '체르니'에게
직접 사사하게 되는데
'리스트'의 집안이 어려운걸 안 '체르니' 선생님은
수업료까지 면제시켜 줬다고 합니다.
'체르니'는 바로
'베토벤'의 직계 제자니까
'리스트'는 '베토벤'의 사손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겠네요.

 

(카를 체르니) 

 


'체르니'에 이어
비엔나 궁정 음악장인 '안토니오 살리에리',
즉, 오늘날 모차르트의 숙적으로 널리 알려진
바로 그 '살리에리'에게도 사사하는 행운을 얻은 그는
11살 때인 1822년에는 비엔나에서
첫 연주회를 갖고 공식 데뷔하게 됩니다.
그 때 '베토벤'과 '슈베르트' 등
유명 음악가들을 만나 큰 칭찬을 받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 후엔
여기 저기 도시를 떠돌면서
돈벌이 연주여행을 다니는데
이버지가 사망하는 16살 때까지 계속됩니다.
아버지를 잃은 후
실의에 빠진 '리스트'는
프랑스'파리'에 정착해
여인과의 사랑, 기독교 신앙 등에 빠져서
2~3년간 방황기를 보냅니다.

그가 다시
음악의 길로 돌아 온 것은
당대의 대 문호, 빅토로 휴고, 하인리히 하이네,
그리고 음악계의 선배 '파가니니', '베를리오즈' 등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작품을 통해 얻은
새로운 영감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무렵
'리스트'는 비엔나에서 파리로 옮겨 온
'쇼팽'을 만나 이것저것 정착을 도와 주면서
급속히 친해지고 서로 존경하는 사이가 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같은 피아노 연주 및 작곡가면서도
성격이 크게 달랐던만큼
한편으로는 서로에게 마음이 끌리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는 라이벌 의식도
컸던 것으로 보입니다.

쇼팽의 연인,
'조르주 상드'를 소개해 준 사람이
바로 '리스트'였으며
'쇼팽'이 요절한 후엔
'쇼팽'의 전기를 집필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특히
'리스트'는
젊은 시절까지만 해도
피아노 편곡과 연주에는 뛰어났지만
작곡 면에서는 다소 취약했는데,
'쇼팽'의 열성적인 작곡 활동을 지켜보면서
많은 자극을 받은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는 75세까지 비교적 장수하기도 했지만
약 700여 곡에 달하는
상당히 많은 작품을 남기게 됩니다.

피아노 곡 뿐 아니라
30대 후반부터 약 10년간은
12곡의 교향시(Symphonic Poem)를 작곡하는데
말년에 작곡한 1곡을 포함해
그가 남긴 교향시 13곡은
클래식 사상 최초의 교향시로 평가받고 있죠.

교향시란
그림, 문학, 신화 등의 스토리를
1악장의 관현악곡으로 표현해서
듣는 이의 상상력을 최대한 자극하는
그야말로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표제음악입니다.

​ '리스트'는
다른 음악가에 비해
유별난 연주회를 선호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리스트' 이전까지 연주회는
보통 Concert라고 불렸는데
Con~ 이라는게 원래 '함께'라는 뜻인만큼
여러 음악가가 출연해서 연주하는 공동행사지
단독 콘서트는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리스트'는 단독 콘서트를 주로 가진데다
악보를 보지 않고 모든 곡을
암기해서 연주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리스트'의 연주회는
콘서트가 아닌
'리사이틀' (Recital, 암송회, 단독 연주회)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리스트'는
'파리'에 정착했지만
한 곳에 지긋이 눌러 앉아 있는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이탈리아, 독일, 영국을 비롯해
자신의 고국인 헝가리 등
수십군데의 도시를 순회 방문하면서
작곡하고 연주회를 가졌습니다.

말년에는
한때 '바흐'가 일하기도 했던
독일 바이마르 궁정의
음악장으로 일하기도 합니다.

그는 1886년
독일의 '바이로이트' (Bayreuth)에서
급성 폐렴으로 사망하게 되는데,
그가 객지, 그것도 독일에서 죽음을 맞게 된 것은
그의 딸 때문입니다.

'리스트'가
프랑스 백작부인 '마리 다구'에게서 낳은 딸,
'코지마' (Cosima)는 원래 유부녀로
풍운의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와 연애를 하다가
결국 결혼까지 했는데
'바그너'는 장인 '리스트'에 비해
불과 2살이 어렸으며
1883년
'리스트' 보다 3년 일찍 죽습니다.

 

 

코지마 바그너 

 


'코지마'는
남편의 사후 '바그너' 음악을 기리기 위해
'바이로이트'에 정착해
매년 '바그너' 추모 음악제를
열고 있었는데
(이 음악축제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음)
장인된 죄로 이 음악제를 돕기 위해 참석했다가
중병을 얻었던 것입니다.

'리스트'
그는
'베토벤', '파가니니', '체르니'를 스승으로,
'베를리오즈', '쇼팽', 슈만을 친구로 두었고,
'바그너'를 사위 삼았는가 하면
드뷔시, 시벨리우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
후배 음악가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
낭만주의 시대의
폭풍의 눈에서 살다간 풍운아였다고
감히 평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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