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반응형

(쇼팽의 녹턴)

녹턴 (Nocturne)즉,

야상곡(夜想曲)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작곡가가 바로

'프레데릭 쇼팽'

(Frederic Chopin, 1810~1849)이죠.

 

녹턴(야상곡)은

문자 그대로

'밤 (Night)이란 단어에서 연상되는,

감상적이고 애수에 젖은,

잔잔하고 감미로우면서도 은밀한 열정을 품은,

환상적인 정취를 표현한

피아노 독주곡을 말합니다.

녹턴 형식의

피아노 곡을 처음 만들기 시작한 사람은

아일랜드 작곡가인

'존 필드' (John Field, 1782~1837)라고 합니다.

그의 음악에 감명받은

'쇼팽'은 약관 20세 때인

1830년부터

녹턴 작품번호 제9번 (1, 2, 3번)을 시작으로

죽을 때까지

모두 21곡의 야상곡을 남깁니다.

'존 필드'는

당시

'쇼팽'의 첫 세 작품을 들은 후

그다지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후세 음악가들은

'쇼팽'의 야상곡들이

레가토 주법과 페달의 기교적인 사용으로

노래하는 듯 섬세한 멜로디를

보다 뛰어난 서정성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존 필드'의 녹턴을 넘어서는

독보적인 최고의 경지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감상하시는

작품번호 제9-2번이

가장 유명하죠.

(프레데릭 쇼팽, 1810~1849)

***

(쇼팽의 삶과 음악)

'프레데릭 쇼팽'은

1810년

폴란드의 바르샤바 근교에서

프랑스계 이주민으로 불어 교사를 하던 아버지와

폴란드 귀족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납니다.

여기서 잠깐

'쇼팽' 이 태어나 성장하던 당시의

폴란드 역사를 요약합니다.

폴란드는

1700년대 후반 이후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3국에 의해

영토가 분할되어 지배 당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일어난 나폴레옹의 정복 전쟁으로

1807년부터 1815년까지는

'바르샤바 공국'이라는 이름으로

프랑스의 지배를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쇼팽'이 태어난 것은

바로 이 시기였죠.

한창 기세를 올리던

나폴레옹은

1812년

러시아를 침공했다가

강추위로 인해

알렉산드르 1세에게 대패함으로써

정권을 잃고 유배당하게 되면서

불행하게도 폴란드는 다시

러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갑니다.

이 시기에 성장한

'쇼팽'은

어려서부터

피아노 신동으로 불릴만큼

음악에 재능을 보입니다.

7살 때인 1817년

이미 '폴로네이즈' (Polonaise, 폴란드 춤곡)를

작곡해서 연주회를 열 정도였죠.

러시아 황실에까지 소문이 나서

바르샤바를 방문한

알렉산드르 1세 앞에 불려가

공연을 갖기도 합니다.

그후

바르샤바 음악원에 입학,

음악을 정식으로 공부하면서

당시 음악의 중심 '비엔나'로

연주여행을 다니기도 하는데,

마침

'쇼팽'이 1830년,

'비엔나'에 연주 여행을 와 있던 중

바르샤바에서

독립을 위한 무장봉기가 일어납니다.

러시아는

대규모 군대를 파병해서

폴란드 시민혁명군을 무력진압하고

폴란드 국민들은 모든 자유를 박탈 당한채

철권통치 하에 들어갑니다.

'쇼팽'은

고국의 독립운동을 돕기 위해

귀국을 시도하지만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귀국을 포기합니다.

그렇다고

러시아와 동맹국이었던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계속 머물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으므로

비교적 폴란드에 우호적이고,

아버지의 나라이기도 한 프랑스로

망명하게 됩니다.

그는 39살에 요절하기까지

끝내 귀국하지 못하고

프랑스에 묻히게 됩니다.

***

('쇼팽'의 심장)

그는

어머니의 나라이자

자신이 태어나고 성장한 폴란드를

평생 그리워 했습니다.

죽으면서

자신의 심장만은 폴란드 땅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남기죠.

그의 심장은

장례 후 시신에서 적출되어

비밀리에 바르샤바로 운반됩니다.

쇼팽을 반동분자로 여기는 러시아 군대의 눈을 피해

'성십자가 성당' (Holy Cross Church)에

안장됩니다.

1944년에는

나치 독일이 바르샤바에 대폭격을 가하게 되는데,

폭격 직전에 한 독일 장교가

쇼팽의 팬이라면서

자신이 '쇼팽'의 심장을 보관했다가 돌려 주겠노라고

성당을 찾아 왔다고 합니다.

그 장교 덕분에

바르샤바와 '성십자가 성당'이 무참히 파괴된 가운데서도

'쇼팽'의 심장만은 무사할 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그 독일 장교는 나중에

전범으로 재판을 받고 옥중에서 죽는데

그의 먼 조상이 폴란드인이었다고 하는군요.

(좌측: 바르샤바의 성십자가 성당, 우측: 성당내 '쇼팽'의 심장 안치소)

 

***

파리에 정착한 '쇼팽은'

얼마 지나지 않아

피아니스트로서, 작곡가로서

큰 명성을 얻게 되고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인

'리스트, 슈만, 베를리오즈' 등과 교류하면서

200여편의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깁니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앞서 언급한 야상곡 21곡 외에

마주르카 춤곡 59곡,

폴로네이즈 춤곡 17곡,

전주곡 27곡,

연습곡 24+3곡 등이 있습니다.

음악 전문가들은

이 작품들 중

마주르카와 폴로네이즈 대부분이

폴란드 민속 무곡에서 얻은 영감을 작품화한 것으로서

'쇼팽'이 얼마나 폴란드를 그리워했고

폴란드의 민족의식을 살리고자 노력했는지

잘 드러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쇼팽'의 녹턴이나 왈츠 곡들은

아마도

그의 연인이었던 프랑스 여류 작가

'조르주 상드' (George Sand, 1804~1876)에게서

영감을 얻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의 많은 명곡들은

6살 연상의 이혼녀면서

사교계에서 활동적이고 남성적이었던

(당시 여성에겐 금지된 바지를 주로 입었다고 함)

'조르주 상드'와 10년 정도 함께 지내는 동안

작곡한 곡들이었으니 말입니다.

쇼팽은

그녀와 헤어진 후

얼마 안되어서 사망하게 되는데

그의 사인은

그의 지병인 결핵, 또는 결핵성 심장염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 보다는

이별의 상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반응형
댓글